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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나 / 최민자

칠부능선 2018. 7. 2. 01:30

   글과 나

     최민자

 

 

  글은 사람이다. 깜냥대로 쓴다. 섬세한 사람은 섬세하게 끄고 묵직한 사람은 묵직하게 쓴다. 제 몸뚱이를 척도尺度로 세상을 재는 자벌레처럼 글이 사람을 넘어설 수는 없다. 몸속 어디 침침한 곳에 미분화된 채 고여 있는 생각들, 강고한 존재감으로 물질성을 획득한 기억과 상념들을 색출하고 용출해 방출해 내는 작업이 글쓰기이다. 한 삼태기의 꽃잎을 쥐어짜 한 방울의 향료를 추출해 내는 일처럼 몸 안에 스민 생각들을 걸러 내 활자화하는 공정도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다.

  사진이 이미지의 물질화라면 글은 영혼의 지문 같은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사랑한 것, 온몸으로 관통해 온 시간이 녹아들어 문채文綵로 드러나는 것이라면 글의 우열을 따지는 일은 영혼에 눈금을 매기는 일처럼 부질없는 처사일지도 모른다. 꽃이 저마다의 체취로 향기롭듯 글도 제각각의 취향으로 빛난다. 그럼에도 좋은 글은 분명히 있다. 너무나 명철하고 아름다워서 통증까지 유발하는 글들도 많다.

어찌하면 좋은 글을 지어 낼 수 있을까. 세상은 넓고 글 잘 쓰는 사람 또한 너무도 많다. 깊고 넓은 인문적 통찰, 예리하면서도 서정적인 여운을 거느린 문장들이 빠르고 정확하게 내리꽂히는 강속구처럼 내 뇌리를 강타한다.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탐색들, 시퍼렇게 날이 선 직관과 빛나는 성찰의 문장을 만날 때마다 글이란 결국 삶의 이력이요 사람 자체임을 여지없이 실감하곤 한다. 앙상한 서사에 덧입히는 상상이나 어설픈 감성의 거스러미를 건드리는 재주만으로는 존재의 심연에까지 당도할 파동을 생산해 낼 수 없을 터이므로.

  처음, 나는 내 글들이 이룬 바 없이 시들어 가는 나를 조금이나마 돋보이게 해줄 장식 깃털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시간의 물살에 마모되고 감가상각당한 외피보다 벼려지지 않고 방치되어 있던 내면이 뜻밖의 빛을 발할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풀을 뜯어 먹고 우유를 생산하는 소도, 척박한 언덕에서 환한 노랑을 길어 올리는 개나리도 되지 못하였다. 세상을 향한 온기도 존재의 품위도 드러내지 못하고 옹색하고 얄팍한 마음 안팎의 풍경이나 자지레한 일상의 단면 따위를 아둔한 필치로 그려 냈을 뿐이었다. 바람부는 광야를 관통해 본 적도, 고요히 홀로 깊어 본 적도 없으니 무엇으로 깊이와 넓이를 더하랴. 깊게 파고 싶으면 넓게 파야 된다는 상식에 눈 감은 채 우물 안 고인 물이나 퍼 올리고 있었음을 이즘에야 아프게 절감하곤 한다.

  한 가지 소득이 있었다면 글이 나를 빛내 주는 장식은 되어주지 못했다 하여도 깃털 노릇은 해주었다는 사실이다. 스테고사우루스의 등줄기에 돋아 있던 멋진 골편이 장식용이 아니라 실존에 불가결한 체온조절의 방편이었듯이 글쓰기는 내게 삶의 덧없음과 허망함으로부터, 그 공격적 허무로부터 방어하고 붙들어 주는 존재의 외피와 다름 아니었다. 피아니스트가 열 손가락으로 선율을 터치해 내듯 나 또한 열 손가락으로 컴컴한 내면의 지층을 더듬는다. 얼짱 각도로 셀카를 찍고 포토샵으로 보정한 가짜 이미지를 진짜 자기라고 착각하는 소녀처럼, 키보드가 분식해 낸 활자들 속에서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내려 애쓴다. 글이 몸통이 되지 못하고 깃털일밖에 없는 사람을 글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도 나는 모니터를 마주하고 있을 때 가장 나다운 충일함을 느낀다. 저 무심한 직사각형의 아가리가 내 생의 시간들을 속수무책으로 빨아들이는 무시무시한 블랙홀이라 하여도 그 팽팽한 긴장과 대결의 시간이 없다면 호시탐탐 덮쳐누르는 불안과 허무를 견뎌 낼 수 없을 것이다.

  좋은 글쟁이가 되지 못하여도 좋은 독자로 늙어 갈 수 있다면 그 또한 충만한 축복일 터이다. 뿅망치로 쾅!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나는 문장을 만나는 일만큼 살아 있음을 각성시키는 순간도 흔치 않다. 예나 지금이나 나를 가장 매혹시키는 사람은 글 잘 쓰는 사람이다. 늙든 젊든, 대머리건 털복숭이건, 살아 있건 고인이 되었건 마찬가지다. 예리하게 벼려진 감각으로 성찰의 깊이를 드러내는 문장의 근력이 초콜릿 복근보다 백 배는 더 매혹적이다. 엔진의 동력과 파괴력이 다른 글들,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가 기품 있게 풍겨 나는 그런 글들의 위엄 앞에서라면 언제라도 나는 흔쾌히 좌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