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학창시절 필력으로 대회 휩쓸었다던 유아인이 쓴 글 - (펌- nuri9 )

칠부능선 2016. 1. 30. 14:34

-공짜, 엄마

 

압구정에 엄마밥상이란 한식당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가끔 가부좌를 틀고 이름 모를 계모의 밥상을 받았다. 뜨끈한 온돌에 엉덩이를 지지며 잠시나마 기름진 손맛을 느끼는 일은 혈혈단신의 타향살이에 크나큰 위로였다. 물론 그 온정에는 대가가 따른다. 갈비찜으로 사치하지 않으면 1인분 가격이 1만원 조금 넘었다. ‘진짜 엄마’의 밥상을 걷어차고 상경한 이후 서울에서 때운 모든 내 끼니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쓸쓸한 허기에 모정을 찾아 비집고 들어간 백반집은 물론이고, 바깥 밥이 입에 물려 어설픈 솜씨로 요리를 하겠다고 들락날락한 마트장 보따리에도 여지없이 계산서가 끊어진다. 그나마 친구에게 덤터기 씌워 해결한 끼니 후에는 커피 한 잔으로라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성가신 염치가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계산서로 손에 들린다. 만약 지금까지 엄마의 집에 얹혀살았다면 종량제 쓰레기 봉투의 규격별 가격이나 대파 한 단의 가격은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내 나이 스물하난가 스물둘인가 할 때, 자동차 부품 공장지대 한복판에 있던 10평 남짓한 오피스텔에 살았다. 바람 심한 날이면 쇳가루가 동향의 창문을 때리며 기괴한 소음을 만드는 방이었는데, 그나마도 월세를 미루기 일쑤였다. 편의점에서 냉동 만두를 사다 튀겨 먹으며 ‘오대수’로 1년 가까이를 거기서 살았다. 높은 데 올라가서 보면 빌딩숲이 우거져 도시에 여백이라곤 없는데 내 베개를 놓을 한 뼘의 그늘을 갖고 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값을 정당히 치르며 타지에서 살아가려면 수도 없이 더러운 꼴을 견디며 비참해지기를 감수해야 한다. 만기가 끝난 후에 친구 두 놈이 사는 방 두 칸짜리 집으로 빈대 붙어 이사를 갔는데 그것은 한참 동안이나 내 마음의 빚이었다. 만약 지금까지 엄마의 집에 얹혀살았다면 나는 훨씬 낭만적인 청년이 되었으리라.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그 말은 절대적인 사실의 생존 지침이고 나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도시는 삭막하다. 서울의 밤은 꽤나 화끈해졌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치열하고 도무지 내 사정 따위는 봐주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식당 아줌마의 계란 프라이 서비스가 기적처럼 느껴지는 이 땅에 정말로 공짜는 없는 것일까. 구경만 하면 주겠다는 화장품 샘플이나 잡지에 딸려 나오는 별책 부록을 진짜 공짜라고 믿으며 마음 달래야 하는 것일까.

 

불필요하게 벌여놓은 집이나 사치스러운 식탁은 고사하고 친구의 호의나 연인의 정열에도 그만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떳떳하기 어렵다. 어떤 친구에게 술을 사는 횟수가 일방적으로 늘어나자 나는 내가 산 술병을 일일이 되짚어 세기에 이른다. 순수한 내 호의를 계산하게 만든 건 저쪽이지만 어쨌든 나는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지난 내 연인은 자기의 사랑 빼기 내 사랑을 하고 남은 것을 세며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나라는 이름 너라는 이름으로 덩어리진 사랑을 주고받고 나서도 더 준 것에 이를 갈고 덜 준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우리는 그렇게 산다.

 

학창 시절에는 엄마가 지금 쓰는 휴대폰 알람의 대신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이면 알아서 깨워주고 밥 먹여주고 용돈 쥐여 엉덩이 두드리며 투정쟁이 아들을 학교에 보냈다. 나는 그 용돈을 택시비로 쓰고 학교에 가서는 친구에게 빌붙어 딸기 우유를 마셨다. 엄마가 내게 제공한 집과 밥과 온갖 금품과 용역은 모두 다 공짜였다. 그때는 공짜인지도 몰랐다. 감사한지도 몰랐고 그래서 더 뻔뻔스럽게 일방적으로 누리던 사랑이었다. 내게 공짜를 주는 것은 엄마밖에 없다. 공짜가 공짜인 줄 모르고 살다가 엄마의 공짜 밥상이 1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이제 와 감격스러워지자 모정이 부채가 되어 뒤통수를 때린다. 내가 아는 세상의 마지막 공짜도 이렇듯 철인지 나이인지 내게 찾아온 불편한 세월 앞에 매진되었다. 세상에 진입해 얼추 어깨를 펴고 선 이제부터는 하루하루 그녀의 은혜를 갚으며 살아야겠지. 그 손길이 아무리 완전무결한 사랑일지라도 그것은 상환 불가능한 자식의 빚이다.

 

매 순간 지갑을 열어야 살아지는 삶을 지극히 당연하게 느끼다가도 타인과 나 사이의 빗금 위로 주고받는 것들이 우리를 계산적으로 만드는 사실에 씁쓸해진다. 엄마의 치마폭에 얼굴을 파묻듯 하염없이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대는 로또를 손에 쥐고 토요일 저녁을 기다리는 일처럼 무모할지라도.

 

엄마가 나 몰래 숨겨놓은 땅 한 무더기가 어딘가 있지 않을까. 빈 반찬통을 가득 채워 가지고 온 친구의 마음을 계산서로 끊어 하루 빨리 결제해야 하는 것일까. 이 바쁜 세상의 그늘 아래에 쉬어가면서 마음의 거래로 너무 분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친구의 외상 장부에 내게 얼마짜리 밥을 몇 번 샀는지 따위의 기록은 없었으면 좋겠다. 내가 준 생일 선물이 숫자로 환산되어 응당한 대가로 돌아오지 않아도 서운치 않았으면 좋겠고, 지인의 결혼식에 낸 축의금의 숫자가 내 마음의 크기를 대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혹여나 내가 낸 10만원짜리 봉투가 마이너스로 돌아오더라도 괘씸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친과 사별한 또 다른 친구가 장례식에 오지 않은 지인들을 일일이 데스 노트에 적으며 자신이 그들에게 준 것들을 세고는 배신감에 치를 떨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내게 반쯤 얹혀사는 친구가 그 어떤 부채 의식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친구는 10평 오피스텔로부터 도망갔던 투룸 집 안방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전쟁 같은 세상 속에서 절실한 동지애 이상의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정도는 어수룩한 낭만을 품는다.

 

고된 촬영이 끝나고 돌아온 부산 중앙동의 호텔방, 1200원짜리 컵라면에 눈물인지 뭔지 뜨거운 것을 붓는다. 시야를 가리는 수증기 사이로 진한 강된장이 놓인 엄마의 공짜 밥상이 스친다.

 

 

 

 

-편의점이 폐업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1층의 편의점이 폐업했다. 편의점인데 12시면 문을 닫으니 나같은 올빼미의 편의에는 썩 맞지 않는 편의점이었다. 다른 편의점은 길 건너에나 있으니 이제부터 담배는 줄고, 충치가 덜 생기고, 더 건강해질 것이다.

 

처음 여기로 이사왔을때 자기 딸이 좋아한다며 싸인을 부탁하던 편의점 아줌마는 그 후로 내가 다녀가는 내내 끼니를 챙겨 묻고, 일은 잘되는지 묻고, 더 필요한건 없는지 물으며 서비스를 챙겨주었다. 밥은 먹었다고 했고, 일은 잘되고 있다고 했고, 더 필요한것은 없다고 했지만 기어코 옆구리로 찔러주시는 음료수를 받아들고 머쓱하게 감사인사를 하곤했다. 어떤 날은 그 친절이 너무 불편해서 담배를 참고 차에 올라타 매니저의 것을 뺐어 문 적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식사는 하셨냐는 그 흔한 인사 한 번 먼저 건낸적도 없을 만큼 나는 무심한 단골이었고, 그래서 마지막까지도 아줌마는 내 이름 뒤에 ‘씨’자를 못 떼냈던 것 같다. 아인씨. 아인씨. 지독히도 불편한 그 이름.

 

아마도 대구의 부모님 집에 살며 학교를 다니거나 이렇게 밤마다 술을 푸겠다고 놀러를 다니거나 했다면 우리 엄마가 그러지 않았을까. (물론 엄마는 나를 홍식이라고 하지만,) 난 또 그 마음이 그렇게 싫고 귀찮아 다정하게 대답 한 번 제대로 해주지 않는 무뚝뚝한 아들 노릇을 했겠지.

 

경상도 남자라 무심하다는 어쭙잖은 핑계로 10년쯤 후에는 매일 저녁 전화해 엄마의 안부를 묻겠다고 다짐한다. 어리석게도.

 

엊그제 마지막으로 편의점엘 갔을때. 그때도 이미 가득 찬 봉투 사이로 공짜 햇반을 꾹꾹 찔러 넣으며 아줌마는 내게 소녀처럼 수줍게 작별인사를 건냈다.

 

“일 잘되고, 담배 좀 줄이고 아, 나 교회가면 아인씨 기도 해요. 나 기도빨 진짜 잘먹거든. 그니까 아인씨 진짜 잘될꺼야.”

 

그런 말엔 무방비였다. 습관처럼 감사하단 말을 할 수도 없었고, ‘진짜요? 기대할께요!’하며 장난스럽게 받아칠 그만큼의 세련된 구석도 내겐 없었다. 하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엄마에게 내가 느끼는것 처럼 죽도록 어색하고 간지러운 마음만 있을뿐.

 

서울에 사는 내내 1년 마다 집을 옮겨 다니며 만나왔던 기억도 나지 않는 우리집 1층의 편의점 아줌마, 아저씨, 알바생들. 내 엄마 보다 더 자주 나를 맞이하던 그 사람들. 어쩌면 처음으로 그들중 한 사람의 인사를 진짜라고 믿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흐릿하게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나는 서둘러 편의점을 나섰다. 그날따라 문에 달린 방울이 더 요란하게 흔들렸다. 내겐 기억할 필요 없는 소리. 딸랑딸랑. 딸에게 조금 더 가까운 엄마로 돌아가는 편의점 아줌마에게 그 방울소리가 얼마나 아련하고 고된 추억일지에 대해 감히 추측해 본다.

 

어젯밤. 담배를 사러 나가며 같은 시간이면 원래도 불이 꺼져있을 그 편의점이 그렇게도 아쉬웠던 것은 굳이 횡단보도를 건너야하는 불편 때문이 아니라 이 정신없이 바쁜 세상에 12시면 문을 닫는 편치 않은 우리 아파트 편의점 아줌마의 지독히도 불편했던 친절 때문이었으리라.

 

뒷통수가 간지러운 과한 친절들을 뻔뻔하게 누리던 삶을 잠시 접고 밤이면 감지도 않은 머리에 모자하나 얹고 어슬렁어슬렁 담배나 사러 나가는 보통의 삶 속에서 내가 다시 그런 불편한 친절을 느낄 수 있을까 되뇐다. 그것이 얼마나 사소하고, 가슴 뜨거운 행운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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