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안녕, 스티브

칠부능선 2012. 1. 10. 14:50

 

안녕, 스티브

노정숙

 

  돌 지난 손자가 '아니' '시러'를 야무지게 한다. 요즘은 아기들도 제 주장이 강해서인가, ‘좋아’ ‘싫어’를 분명하게 표현한다. 제 엄마 아이폰을 가지고 잘 논다. 그림을 살피며 쓱쓱 밀어서 여는 법을 알아내고 제 눈에 익은 그림을 톡 건드려서 열고 까르르 웃는다.

  디지털 혁명을 이룬 스티브 잡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우리를 경이로운 세상으로 인도했다. 스마트 폰으로 음악과 강의를 듣고, 동영상을 찍는다. 실시간 교통정보를 보며 막히는 길을 피하고, 밖에서 이메일을 확인한다. 궁금한 것이 있을 때는 바로 인터넷 검색을 한다. 그가 만든 기술중에 작은 부분을 활용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내게는 혁신적이다. 스마트폰을 만나면서 혁신과 거리가 먼 내 생활에 짧지만 산뜻한 기운이 돌았다.

  나랑 동갑인 잡스, 2011년 10월 5일에 크고 빛나던 별 하나가 지구를 떠났다. 그는 항상 변화하려 했다. 경제에 도움이 안 된다고 우리가 푸대접하고 있는 인문학을 기술에 융합시켰다. 음악가와 화가, 시인과 역사가의 전문성을 컴퓨터에 결합했다. 그는 새로운 기술로 생활의 편리함뿐만 아니라 감각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세이 미야케 검정색 터틀넥과 리바이스 청바지는 군더더기 없는 잡스 룩이다. 21세기의 제임스 딘을 떠올리게 하는 스타일리시, 명료한 디자인의 완성이다. 그의 도전과 변화에서 선적(禪的) 직관력과 통찰력을 본다.

잡스를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든 힘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서 나오는 열정이다. 아닌 것에 대해서는 ‘NO’라고 천 번이라도 외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는 게 이기는 거다.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발 뻗고 못 잔다'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랐다. 창의적 사고보다 패배주의를 미화하는 낙천성을 먼저 익혔다. 싫다고 말하는 것은 나쁜 것과 같은 말이었다.

언제나 좋은 것을 하기 위해서는 싫은 일을 먼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무를 다 한 후에 얻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선을 그었다. 대가족의 번다한 손님치레와 인사치레가 연중행사다. 이런 행사들이 힘겹고 싫었다. 이런 내 감정을 표현하는 건 고사하고, 의무로 하는 일을 좋아하는 일인 척한다. 이왕 해야 하는 일이라면 즐겁게 하자며 스스로 세뇌까지 시킨다. 돌아보니 내가 좋아하는 일보다 남들이 좋아할 일에 몰두하지 않았는가.

  어른이 되어 불편한 것은 싫어도 싫은 내색을 하지 못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은 정년퇴임을 한 후로는 싫은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나 보다. 담배를 끊으라고 그렇게 이르건만 '싫다'고 한다. 가끔 청소기를 돌리라고 하면 '싫다'고 한다. 장보러 같이 가자고 해도 때때로 '싫다'고 한다. 이럴 때 마다 제대로 싫다고 해 본 적 없는 나는 억울하다.

  ‘No'를 당당하게 말하는 남편은 아직 좋아하는 일을 찾지 못한 듯하다. 그동안 창의성 없는 일을 해서인지 그저 친구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글을 알고부터 주절거리는 것보다 읽거나 끼적거리는 걸 좋아한다. 사회에 공헌하거나 생활을 바꿀 거창한 글줄엔 어림없지만, 못난 자신을 내보이는 속없는 짓에 빠져있다. 꿈꾸는 머리를 따라오지 못하는 어둔한 재주 때문에 내 글쓰기는 괴로울 때가 더 많지만, 아직은 좋아하는 일이라며 밀고 나아간다.

  ‘싫다’와 ‘좋다’를 확실하게 표현하는 요즘 아기들, 손자가 살아갈 세상은 좋아 하는 일만 하면서 살 것 같다. 주견이 뚜렷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가치기준에 흔들리지 않는다. 제 마음과 통찰력을 믿으며 좋아하는 일에 전력투구 할 것이다.

  아기들아, 너희도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 그리하여 제2, 제3의 스티브 잡스가 되어 세상을 바꾸어라. 거창한 무엇이 아니어도 좋다. 인간이 중심인 세상에서 인간미 물씬한 정을 나누며 흥겹게 살아라. 다가오는 미디어 시대에는 ‘나눔’과 ‘배려’가 새로운 경쟁력의 핵심이 된단다.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낸 잡스, 그가 한 입 베어 먹고 둔 사과에서 근사한 향이 난다. 나는 그 향에 마냥 취한다.

 

<계간수필> 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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