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겨울산

칠부능선 2008. 2. 11. 21:58

 

아침에 라디오에서 부동산전문가라는 사람이 땅을 살때는 겨울에 보고 사야한다고 ,

여자의 맨얼굴과 같이 겨울은 일체의 장식이 없는 적나라한 맨몸을 볼 수 있다고,

주변환경과 경사도를 정확히 볼수 있다고...

늘 시큰둥하게 듣는 부동산정보인데..... 귀가 확 열렸다.

 

친구들과 곤지암 친구에게 갔다.

늘 하는 코스로 외할머니댁에서 담백한 점심을 먹고,

오늘은 그 죽여준다던 동동주는 먹지않았다.

그냥 맹숭맹숭하게 콩나물 밥과 도토리묵과 손두부를 먹었다.

 

친구의 작업실겸 휴식처인 공소의 종탑은 여전히 나를 내려다 보고,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맨몸으로 우릴 반긴다.

울굿불긋 재재거리던 꽃밭은 깊이 잠들었다.

아랫목이 따끈한 방에 발 뻗고 앉아 앙증맞은 상에 눈이 번쩍 뜨이는 찻잔.

붉은 양귀비꽃과 보라색 도자지꽃 찻잔이 예술이다.

여행중에 거금을 썼다는 친구.

우리 나이에 이 정도 호사는 부려도 되겠지. ㅎㅎㅎ

그럼 그럼.

다 비운 찻잔 바닥에서 꽃이 피어난다.

살짝 노오란 꽃술이 방긋 웃는다.

 

찻잔에 한참 취한 후에 겨울산에 올랐다.

눈이 녹지 않은 산,

지난 여름 귀품나던 싸리나무가 씨앗을 조롱조롱 매달고 있다.

양지녘과 음지가 확연히 구별되는 산길을 올랐다.

아, 초입에 미끄러진 동네 어른의 차를 밀고..

실패하고 결국은 써비스센타에 전화를 해드렸다.

지난 여름 성성하게 만났던 낯익은 낙엽더미를 헤치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던 벤치에도 앉아보고,

등에 땀이 베일 무렵 내려왔다.

 

오래된 친구와 겨울산이 닮았다.

오늘 방송에서 듣던 맨얼굴들, 모든 장식을 거부한 당당한 생얼굴.





Ivan kuchin의 Mil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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