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636

파키스탄 히말라야 / 거칠부

거칠부의 거침없는 걸음을 눈길로 따라가며, 내 마음이 아직도 여전히 설레는 게 대견하다. 과장없는 담담한 토로가 마음에 든다. ​ ​ ​ ​ * 라인홀드는 낭가파르바트 등정 후 눈사태로 동생을 잃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검은 고독 흰 고독》은 8년 만에 다시 낭가파르바트를 등반하는 동안 겪었던 내면의 갈들과 불안, 고독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동생 권터와의 이별과 단독 등반의 불안을 검은 고독으로, 불안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유로워졌을 때를 흰 고독이라 표현한다. 루팔벽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한 고독한 등반가의 독백이 들리는 듯했다. ​ " 나는 언제나 망설이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그럴 때면 지난 일도 다가올 일도 모두 내 앞에서 사라지고 만다. 나는 어떤 일이건 그것이 나에게 전부..

놀자, 책이랑 2023.01.23

꿈속의 꿈 / 윤상근

윤상근 선생이 어머니에 대한 사무침이 바로 전이된다. 나처럼 내 할일 다 했다고 뻔뻔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숙연하고 울컥해진다. 받자마자 잡은 책을 단숨에 다 읽었다. 마지막 챕터 은 짧은 소설이다. 같은 주제지만 소설의 옷을 입으면 더 자유롭다. 70대 작가가 90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풀어놓은 이야기는 수필 너머, 소설 너머의 진실을 훤히 그려준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이 시대 모두의 고민이기도 하다. 문학의 치유 능력을 생각했다. 어머니께 이 책을 바치고 작가는 조금 가벼워졌기를 빈다. 솔직하며 담백한 문장들이 단숨에 읽히는 건 작가의 대단한 내공이다. ​ ​ ​ * 오신 곳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 ​ 어머니 돌아가신 지 백 일이 되어갑니다. 아직도 하루에 몇 번씩 ..

놀자, 책이랑 2023.01.20

남자의 자리 / 아니 에르노

배경이 익숙하다. 먼저 읽은 두 권과 같은 장소에서 그의 아버지가 중심인 이야기다. 딸이 나보다 나은 환경, 나보다 나은 위치에서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어디서나 같다. 경험한 것, 사실만을 쓴다는 아니 에르노의 소설이고 보니, 나를 소재로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내야 하는 수필 작법에도 통하는 구절들을 만난다. ​ ​ ​ * 나는 천천히 쓰고 있다. 사실과 선택의 집합에서 한 인생을 잘 나타내는 실타래를 밝혀내기 위해 애쓰면서, 조금씩 아버지만의 특별한 모습을 잃어가는 듯한 기분이다. 글의 초안이 온통 자리를 차지하고, 생각이 혼자 뛰어다닌다. 반대로 기억의 장면들이 슬며시 미끄러져 들어오게 두면, 아버지의 있는 모습 그대로 가 보인다. ... 물론 들었던 단어와 문장에 최대한 가깝게 써야하는 이런 ..

놀자, 책이랑 2023.01.15

라그랑주점 / 이상수

이상수 수필집, 장정이 깔끔하다. 왠지 자신감 넘쳐보인다. 글을 쓰는데 연식이 깊이나 넓이를 좌우하지는 않는다. 빛나는 건 처음부터 빛난다. 긴 시간 갈고 닦아서 빛나는 것도 있지만... 오랜 준비를 마치고 수필 동네에 입성했다. 드러난 시간보다 더 오랜 담금질이 글에서 느껴진다. 몰랐던 정보도 신선하다. 좋은 수필을 계속 쓸 기대감에 든든하다. ​ ​ - 작가의 말 마침내 여행이 시작되었다. 쓸쓸한 운동화의 시간을 신고 바람과 구름과 햇살과 비를 좇아간다. 더욱 혼자가 되겠지만, 작은 봇짐 속에 꽃 한 송이 있다면 더 이상 외롭진 않을 것이다. 2022년 가을 이상수 ​ ​ * 수더분한 외모를 보고 주위에선 나를 편한 사람으로 오인한다. 그러나 조금 지내다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원칙에 어..

놀자, 책이랑 2023.01.10

칼 같은 글쓰기 / 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의 소설과 달리 단숨에 읽혀지지가 않았다.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와 이메일로 주고받은 글쓰는 방식과 상황에 대해 나눈 이야기다. 경험한 것만을 쓰겠다는 에르노는 소설을 쓰면서 다른 일기를 동시에 쓴다고 한다. 경험을 모두 쓴다지만 말할 수 있는 것과 혼잣말로 두는 것이 따로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 * 내겐 글을 쓰면서 따로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나의 첫 글쓰기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문학적으로 지향하는 바 없이 그저 내밀한 생각을 털어놓은, 말하자면 사는 데 도움을 주는 글쓰기였어요. 열여섯 살 때 처음으로 내면일기를 쓰기 시작했지요. 몸시 우울한 어느 저녁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내 인생을 글쓰기에 바치리라고는 특별히 예측한 적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

놀자, 책이랑 2023.01.08

말 이상의 말 글 이상의 글 / 김정화

김정화 선생이 '리뷰 에세이'를 냈다. 책을 읽고 쓴 리뷰와 수필의 차이을 생각해 본다. 모든 글이 읽은 책을 영양으로 싹이 튼다. 그것을 전면에 배치하느냐 바닥에 장착하느냐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드러냄과 감춤을 적절히 해야 가독력이 높다. 책이 책을 부르는데 성공했다. 내가 읽은 책 보다 읽지 못한 책이 더 많다. 그럼에도 거의 아는 작가라서 가깝게 다가온다. 충분히 불씨를 당겼다. 삶과 버무린 '리뷰 에세이' 이 오래 새겨지길 바란다. ​ ​ ​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읽고 쓰면서 점점 '내'가 되어갈 것이다. 이번 '리뷰 에세이'가 독자들의 가슴에도 문학의 불씨를 댕겨 책 권하는 도화선이 되길 희망한다. - '작가의 말' 중에서 ​ ​ * 수주의 글에서는 술꾼의 멋과 품격이 무엇인지..

놀자, 책이랑 2023.01.05

하늘 비자 / 송마나

송마나 선생님은 몇 해 전, 관여 선생님의 희수 깜짝 파티에서 한 번 뵌 적이 있다. 철학 수필 그룹이라는 것, 글이 비상하다는 것, 멋진 모자를 쓴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 첫 작품 '배꼽'을 통해 귀한 딸로 자랐고, 아버지가 '마음의 꽃' 을 쓴 수필가셨다는 것, 함께 쇼핑하는 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래 숙성된 언어의 폭죽이 곳곳에서 터진다. 나는 금세 몰입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갔던 '세이렌들의 바위'는 참 허술했는데... 이오스 섬에서 맞은 일출만 떠오르는데, 그곳에 호메로스의 무덤이 있었다니... 내가 밟았던 이국의 지명들과 내가 읽은 작가들을 만나는 기쁨과 내가 모르던 철학과 신화의 물결을 타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공부를 일깨우는 수필이다. 읽고 싶은 책 메모가 늘어났다. 웅숭깊은..

놀자, 책이랑 2023.01.03

The 수필 2023 빛나는 수필가 60

다섯 번째 이 나왔다. 5년이 금세 지난 듯, 나름 의미있는 직업이었다. 선정된 작가들이 자신의 프로필에 선정 사실을 올리는 걸 보면 감사하고 흐뭇하다. 선정위원 8명의 취향과 안목이 모두 다르지만, 선명하고 공정한 방법으로 접점을 잡은 결과다. 60편 작품이 한 해의 최고의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최선의 작품이라고 내놓는다. 이 빛나는 수필이 널리 많이 읽기길 바란다. ​ ​ ​ 출판사 제공 책소개 독자의 시각과 취향 모두 만족시킬 예술성과 문학성 탁월한 60편의 시선 ​ 2023년 수필문단에서 주목해야 할 빛나는 수필가들의 수필 60편을 만날 수 있는 『The 수필, 2023 빛나는 수필가 60』이 출간되었다. 『The 수필, 2023 빛나는 수필가 60』은 지난 일 년 동안 여덟 명의 선정위..

놀자, 책이랑 2022.12.22

겨울호 숙제

각 잡지의 겨울호를 아직 다 못 읽었다. 아직 안 온 잡지도 몇 있다. 이번 현대수필 겨울호도 출판사 실수로 일주일 이상이 늦어졌다. 지난 주에 독촉 문자와 전화도 받았다. 잡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 많은 잡지들이 나름 고군부투하고 있다. 예전에는 왜 그럴까, 이해를 못했는데... 세월은 힘이 세다. ​ ​ ​ 수필이 넘어야 할 문턱 신재기 .... 문학이고자 욕망하지 않을 때 수필의 본질이 선명해진다. 수필은 문학이기 전에 글쓰기다.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굳이 문학적 전략을 동원할 필요는 없다. 글쓰기는 글 쓰는 사람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현실의 어떠한 구속에도 굴하지 않고 내 존재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글쓰기다 이에 오늘의 수필은 관행적 격식을 해체하고 문학에..

놀자, 책이랑 2022.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