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635

루이와 젤리

시작부터 주눅 들게 신성하다. 루이와 젤리 부부는 생활의 모든 지향을 하느님 뜻에 두고 산다. 그런 삶의 응답인지 다섯 딸이 모두 성소를 받는다. 이 기꺼운 삶 안에도 고통이 있다. 어린 자녀를 넷이나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젤리는 병이 든다. 젤리의 투병 자세는 인간의 오감을 넘어서 거룩함에 이른다. 루이는 노년에 정신병원까지 가는 고통을 겪는다. 그 안에서 또 다른 뜻을 찾는 딸의 믿음, 이미 천상의 마음이다. '보시기 좋다' 하셨을 ... 내 맘대로, 그저 '믿는다'는 나를 너무도 부끄럽게 한다. ​ ​ ​ * 그전의 젤리의 기도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조금은 자기중심적인 청을 드리는 기도였다. 하지만 이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성모님처럼 '피앗(그애로 제게 이루어지소서)'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80..

놀자, 책이랑 2023.05.19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 줌파 라히리

줌파 라히리, 참 생소한 이름이다. 유발 하라리는 이제 입에 붙었는데... 처음은 다 그렇겠지. 익숙한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이탈리아어를 배워서 소설을 쓴다. 줌파 라히리의 첫 산문집이다. 첫 소설집으로 퓰리처상, 팬, 오헨리 문학상, 헤밍웨이 상을 탄 작가가 그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언어에 도전한 게 대단하다. 그의 도전의 변을 들어본다. 이 작은 책은 이탈리아어 사전이다. ​ ​ 이 간결한 목차가 맘에 든다. 영어에서 이탈리어어로 건너가는 과정에 사전을 끼고 살았다. 번개에 맞은 것처럼 전율을 느낀 이탈리아어 사랑이 시작되고 영어 세상에서 스스로 추방되고... 어느 날 부터 일기가 이탈리아어로 써지더니 소설이 써지는 것이다. ​ ​ * 사람들은 사랑에 빠졌을 때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한다. 지금 경..

놀자, 책이랑 2023.05.16

김탁환의 원고지 / 김탁환

오래 전 을 읽으면서부터 김탁환을 바라봤다. 그때는 명작을 통해 알게 된, 글쓰기가 즐거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그 생각은 너무도 한가로운 마음이었다. ​ ​ '추억에는 언제나 경련을 일으키는 세부사항이 있다.' - 아니 에르노의 말로 시작한다. ​ ' 『김탁환의 원고지』 는 2000년부터 2010년까지 침묵으로 쓴 창작일기다. ... 내게 원고지란 글을 쓰고 싶은 첫마음과 동의어다. ... 소설을 끝내면 참고도서만 남는 줄 알았다. 호랑이처럼 홀로 떠도는 작가에게 창작일기란 날마다 몰래 치른 백병전의 흉터이자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쑥스러운 선물이리라.' 작가의 여는 글에 이어 연보가 나온다. ​ 이 맹렬한 창작의 결과물들을 바라보며 그저 입이 딱, 벌어진다. 발자크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노동자다. ​..

놀자, 책이랑 2023.05.07

바람의 말 / 최현숙

안동의 최현숙 선생님을 못 뵌지 수 년이 되었다. 만나지 않아도 가끔 생각나는 분이다.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느낌이 믿음직스러운, '난, 이런 사람이 좋다' 이런 주제로 글을 쓴다면 내 글에 등장할 1인이다. 오래 숙성하여, 무르익은 수필집이다. 수필집 한 권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인다. 짐작한 그대로라서 더 반갑다. 깊이 고개 숙이며 박수보낸다. 나날이 글을 품고, 기쁘시길 빈다. ​ ​ * 글을 만나면서 외로움 낯섦과도 친해졌습니다. 보이는 풍경 오가는 말 심지어 자동차 소음까지 글감으로 다가왔습니다. 평범한 일상이 글이 되는 과정이 좋았습니다. 부대끼는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고 소소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눈도 갖게 되었습니다. 수필의 길에 들어선 보람입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 ​ * 태..

놀자, 책이랑 2023.04.17

마릴린 먼로가 좋아 / 이찬옥

나는 소설을 수필로 읽는 버릇이 있다. 최근에 카뮈와 헤세를 읽으면서도 그들의 생애를 더듬는 걸 보니 습관이 되어버린 듯도 하다. 어이없게 '작가의 말'을 읽으며 두 편으로 나누면 좋을 수필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8편 단편소설이 그만큼 현실감 있게 읽힌다. 박수보낸다. ​ ​ * 수중에서 온종일 흐느적거리는 꼬리가 저려서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무도회장을 찾아갔다. 무도회장에서 그를 만났던 날, 그는 입구에서 수줍게 서 있던 나를 이끌고 사방이 거울로 된, 그래서 몇 배 더 넓어 보이는 무도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어지러웠다. 나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아도 음악에 맞춰 얼굴을 마주 보며 손을 잡고 함께 스텝을 맞춘다는건 얼마나 은밀한 대화인가. (30쪽) ​ 아쿠아리스트 여자..

놀자, 책이랑 2023.04.08

공부론 / 김영민

새로운 교재를 탐색하느라 책 몇 권을 주문했다. 공부가 의무이던 때는 공부가 싫어서 딴짓을 많이 했는데, 이제사 공부가 좋아졌다. 지금 내 공부라는 건 그저 책 읽는 것이지만. 시험이 없으니 가볍고 즐겁다. ​ 인이불발引而不發, 당기되 쏘지 않는다니.... 김영민의 예사롭지 않은 생각을 따라가본다. 예스런 우리말이 반갑다. 검색을 해 봐야 하나? 그냥 느낌대로 일단 읽어나간다. 아무래도 되새김이 필요하다. ​ ​ * ... 자본의 힘과 기술의 마력 사이에서 몰풍스레 실그러져 버린 인문학 공부의 이치(人紋) 는 어디에 있을까요? .... 익으면 진리가 도망치듯, 도망치는 진리를 도망치는 대로 놓아두는 것! 그처럼 기다리되 기대하지 않고, 알되 묵히며, 하이얀 의욕으로 생생하지만 욕심은 없으니, 당기되 쏘지..

놀자, 책이랑 2023.04.06

문도선행록 / 김미루

(329) [도올TV] ❤️ 김미루 Miru Kim 작가가 뉴욕에서 전하는 [문도선행록] - YouTube 친구가 보낸 도올TV를 보고 바로 주문했다. ​ 화가, 사진작가, 행위예술을 하는 81년생 김미루가 3년 동안 사막에서 생활하고 3년동안 정리했다. 도올 선생의 막내딸 김미루, 아버지의 후광이 없어도 충분히 주목받을만하다. 명진스님 말대로 아버지 도올이 책으로 익힌 도라면, 김미루는 몸으로 깨우친 도道와 선禪인 거다. 오래 전에 돼지우리에 누드 사진을 봤을 때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지만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충분히 와 닿았다. 자유로운 글쓰기다. 문법에 묶이지 않고 구어체 말들이 솔직하게 펼쳐지는데, 긴장과 함께 문득문득 귀엽기까지 하다. 그 안에 이미 어른이 있다. "세상에나~~" 용기에..

놀자, 책이랑 2023.04.02

헤르만 헤세 시집 / 헤르만 헤세 시. 그림

싱거웠던 헤세 시집을 다시 잡으며 그의 생애를 살펴보았다. 유복한 선교사 가정에서 태어나 온갖 악동짓을 하면서 유년을 보내고, 비상한 두뇌로 바젤의 명문신학대학에 다녔지만 규율을 견디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다. 서점 점원일을 하며 스물한 살에 시를 써서 자비 출판을 한다. 칼프에서 태어났으나 스위스, 바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스위스 국적을 얻는다. 맹렬하게 반전 운동을 하다가 독일에서 배척당하고 스위스에서 을 출간하고 성공한다. 1962년 사망 후에 미국에서 헤세 붐이 일어난다. 평화가 시급한 일본에서는 50년대에 헤세 붐이 일었다. 이후 평화주의자의 뜻이 시대의 뜻이 된 것이다. 조국에서 배신자로 몰리고 외로운 처지에 알프스가 바라보이는 전원 생활이 시로 풀어나온다. 어린 시절 부터 '시인이 아니라면..

놀자, 책이랑 2023.03.30

유리알 유희 / 헤르만 헤세

헤세의 구도의 길은 멀고 아득하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데미안』의 구절을 암송하던 시기를 지나왔다. 『수레바퀴 아래서』, 『인도에서』 몇몇 작품을 어정거리고, 『싯다르타』에 푹 빠지기도 했다. 헤세의 책을 몇 권 못 읽었지만, 그는 참으로 반듯하고 착하다. 반항의 키워드, 카뮈를 읽은 후라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 지도 모르지만 .. . 그의 작품에는 에밀 싱클레어와 데미안, 싯다르타와 고타마, 골드문트와 나르치스 같이 상반된듯하지만,결국 하나로 모아지는 구도자의 모습들이 등장한다. 스승과 제자, 아버지와 아들, 친구관계도 서로 어우러져 윤회의 고리를 떠올리게 한..

놀자, 책이랑 2023.03.23

눈동자와 입술 / 임헌영

범우문고판이다. 내 큰 손에 딱 잡히는 앙증스러운 판형이다. 선생님 뵌듯 반갑게 읽었다. 이미 읽은 작품도,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도 모두 새롭다. 임헌영 선생님 강의 때 자주 터지는 웃음을 만났다. 분명 활짝 웃었는데 뭔가 뒷끝이 있다. 골계수필을 떠올렸다. ​ ​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모파상은 문학에 매달려 "나를 위로해 주오. 나를 즐겁게 해 주오. 나를 슬프게 해 주오. 나를 감동시켜 주오. 나를 꿈꾸게 해 주오. 나를 웃게 해 주오. 나를 두렵게 해 주오.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해주오. 나를 사색하게 해주오"라고 애원하다. 그러려면 누구나 푸근하게 쉬어가고 싶을 정도로 인간미가 넉넉하거나, 입심에 재기 넘치는 감수성까지 갖춰야 하건만 나라는 인간은 그저 무덤덤한 게 영 밥맛이니 글쟁이로..

놀자, 책이랑 2023.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