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또 다른 세계

칠부능선 2006. 6. 16. 18:14
 

                           또 다른 세계



                                                         


  

  '학문에 취하고, 사람에 취하고’ 이슬람 강의를 듣고 가면서 친구가 날린 문자다.

  '너도 취하는걸 아니, 그건 내 전공이지. 무엇에건 잘 취하는 거’ 답장을 보내며 피식 웃는다.

  나는 이슬람에 한동안 취해있었다.

  친구가 소개한 세계경전연구회는 경전에 대한 이론적 해석을 인간적 삶의 현실에 초점을 맞춘다. 경전이 전해주고 있는 초월적 진리를 삶 안에서 조명해 보는 연구모임이다. 연구회 사람들은 각자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편견 없이 서로 넘나들며 교섭한다.

  가톨릭신학대학 교수인 곽상훈 신부는 우리나라 사제 중 첫 불교학 박사가 되었다. 종교 간의 화해와 교류가 시대적인 요구인 만큼 기대가 크다.


  새로이 알게 된 이슬람은 현재진행형으로의'복종'을 의미한다. 아니 이들에게는 신앙에 대한 회의나 의문이 없다는 말인가. 그것이 순명의 자세라는 의식적인 과정도 아닌, 단지 생활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생각하니 더 이상의 행복은 없을 듯도 하다.

  이슬람은 다양한 분파를 가지고 있는데 그 다양함을 신의 축복으로 여긴다. 정통과 이단으로 나누지 않고 상대를 그대로 인정한다.

  경전인 꾸란은 낭송이란 뜻이라고 한다. 절대자의 말씀을 전하는 무함마드의 말을 기록한 것이다. 문맹자라는 무함마드에 대한 인간적인 해석은 천진에 가깝다.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야 의문 없이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글을 깨우치는 순간 자기주장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순종의 덕을 갖춘 귀만이 말씀의 통로로 선택된 것이다.

  전달자, 도구로서의 무함마드는 가톨릭에서의 마리아와 동격인 셈이다. 꾸란에 표기된 예수, 무슬림(이슬람신자)이 보는 예수는 믿음의 대상이 아닌,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나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에 잠시 빠졌다.

  말이 곧 법인 그들은 무슬림 앞에서󰡐알라 외에 신은 없고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다󰡑고 선언하면 바로 무슬림이 된다는 것이다. 다만 그 말이 남자의 말에 한정해 있는 것이 아쉽다.

  교리공부의 까다로운 절차가 없는 입문은 가톨릭의 엄숙주의와 비교된다.

  이들은 성(聖)과 속(俗)의 구별보다 허락된 것과 허락되지 않은 것을 생활의 기준으로 삼는다.

  일상에 녹아있는 이슬람 신앙의 절정은'라마단'이다.

  이슬람력 9월 한 달 동안 무슬림들은 새벽부터 일몰까지 단식과 금욕을 한다. 인간의 끊임없는 탐욕을 점검하는 라마단은 단지 단식과 금욕뿐 아니라 남을 비방하거나 헐뜯는 말을 삼가며 화를 내거나 부정한 것을 보는 것조차도 삼간다. 절제 이상의 그 어떤 내적 성찰을 바탕으로 한 인간적인 욕구와의 투쟁이다. 이 장엄한 의식으로 사랑과 진실, 헌신을 재점검한다. 라마단을 무사히 끝낸 다음날은 한 달간 절약한 양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축제로 의식을 마무리한다.

  이슬람 영성수도자들을 수피라고 한다.

  모스크(성전)와 마드레세(신학교)가 사라질 때에 비로소 수피들의 일이 시작된다고 믿는 그들의 신앙은 본질적인 체험, 율법을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을 향하고 있다. 심판이 두려워 믿는 하느님이 아닌, 오로지 사랑의 존재로서의 하느님만을 원한다는 그들의 신앙은 다분히 신비롭다. 수피들에게 하느님은 인간의 혈관보다 더 가까이 있는 존재로서 극진한 찬미의 대상이다.

  경전에 묶이지 않는 수피들의 믿음은 초월적 경지에 닿아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과연 문자가 사람을 죽이고 사랑만이 살게 할까.


  앙드레 지드는 가톨릭인 어머니와 신교도인 아버지사이에서 성장했다. 전례와 율법으로 무장한 생활의 답답함을󰡐가톨릭은 참을 수 없고, 개신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성전 안에서나 밖에서나 세상은 이해할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이 무차별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부대끼며 닳고 닳아 노회한 감성은 웬만한 일에 격분하지도 감동하지도 않는다. 참을 수 없는 일이 없다는 자체만이 어쩌면 참을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현대는 어떠한 종교도 한 종교가 한 문화권을 온전히 지배하지 못한다. 이는 공동체보다 개인의 삶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한 발 내딛고 두 발 거두어들이는 것이 나의 신앙이 아닌가.

  오늘, 또 다시 혼돈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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