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빗나간 과녁

칠부능선 2006. 6. 14. 23:17

    

              빗나간 과녁

 


  

  목사와 신부가 골프장에 갔다. 

  생각대로 맞지 않는 공을 향해서 목사가 연신 투덜댄다.

  “×× 더럽게 안 맞네”

  계속되는 욕설에 심기가 불편해진 신부가 말한다. 

  “그런 욕 자꾸 하면 벼락 맞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부는 벼락을 맞고 쓰러졌다.

  놀란 목사가 하느님을 향해 외친다.

  “하느님, 벼락맞을 사람은 전데 어찌된 일입니까?” 

  “더럽게 안 맞네”

  모임에서 여담으로 듣고 배를 잡고 웃었다.


 

  상벌(賞罰)이 어긋나는 시대의 농담이다. 

  부당하게 여겨지는 세상사에 대해 이제는 저항할 열정도 없는데, 관조하는 폼으로 바라다보기에는 억울한 일이 너무 많아 대강대강 얼렁뚱땅 넘기는 대로 넘어가야 하는데, 내 못된 예민함은 자주 상처를 받는다. 긴 시간 차례를 기다리는데 새치기하는 사람을 향해 시원하게 욕설을 할 수도 없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남의 몫을 탐하는 염치없는 사람을 향해 그 부당함을 따질 수도 없다. 목소리 크고 말 잘 하는 사람이 우선하는 세상에 그래도 버티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고전문학은 권선징악으로 끝을 맺지만 현대에는 그렇지가 않다. 권선징악은 너무 뻔해서 진부한 결말이니,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예측할 수 없는 모호함으로 끝내야 한다. 황당한 결말에 멍해지기도 하고 빈곤한 내 상상력이 곤혹스러워하기도 한다. 여러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끔, 깔끔한 해피엔딩을 보면 머리가 산뜻해진다.

  지난 시대의 고통을 몸으로 산 사람, 개혁의 중심에서 피 흘린 사람에 대한 보상은 어디에도 없다. 소외된 영웅은 계속 외곽에 둔다. 시대의 희생자를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잊는다. 건설을 위한 독주는 독재의 시대로 이어진다. 독재에 저항하던 때에는 언론의 자유와 착취당하는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 신념을 위해 목숨 바치는 열정이 있었다. 민중의 자유를 노래하던 저항시대에는 말과 글을 바꾸지 않고 감옥으로 향하던 사람이 많았다. 그때는 나도 불의에 분개하고 명동성당 앞 시위대 속에 머릿수 하나를 보태면서 목청을 합하였다. 내 몫과 상관없어도 불의에 대한 분노로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에 갈채를 보냈다.  흘린 피의 보상이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희망도 있었다. 낭만의 겉치레와 함께 젊음은 비굴하지 않고 무모하지도 않았다.

  지난 역사에 공과(功過)를 가르지 못하고 앞으로 나가기만 한다. 제대로 된 목표물 없이 서로의 눈치만 보며 당략에 쓸려 가고만 있다. 왜 가는지, 무엇을 향해서 가는지도 모른다.

  정의를 위해, 잘못된 제도를 위해 몸 바친 소수의 사람이 권력의 중심에 섰다. 권력의 중심에 서게되면 정의의 개념이 바뀐다. 어제의 절박한 문제들은 빛 바래고 권력의 향유에 익숙해진다. 겉으로 개혁을 외치면서도 전례(前例)를 닮아 가는 전례만 남긴다. 공허한 구호를 앞세우고 새로운 세력확장에 몸바친다.

  다음 세대가 또, 새로운 정의를 외친다.

  시대가 바뀌면서 거칠고 과격해지는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약자를 위해서, 잘못된 제도를 위해서가 아닌 그들의 시위는 모두 자신의 밥그릇만을 걱정한다. 내 것 챙기기에만 급급한 그들에게는 한 발 물러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란 사치에 불과하다.  치열한 투쟁만 있을 뿐이다.

  함께 할 수 없는 고통보다는 평온한 내 삶에 대한 안위를 걱정하는 비겁한 소시민이 되면서 그들을 방향감각을 잃은, 목표가 수상쩍은 사람들로 몰아붙인다. 

  쓰레기 처리장, 납골공원, 장애자 수용시설 들이 필요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내 가까이 생기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다른 지역에서 양보해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법칙에서 무관한 사람, 스스로 특권계급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하수처리장 옆으로 흐르는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고, 작은 꽃이 만발한 납골공원은 꽃이름 불러주며 아이들과 산책하기 좋고, 넓은 운동장이 있는 장애자시설에서 함께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본다. 이런 시설들을 어떻게 혐오시설이라 할 수 있겠는가. 아름다운 환경을 만드는 일, 기본을 지키는 일을 너무 오랫동안 미루고 있었다.

  방조죄, 방관죄에 묻혀 살면서 어디까지가 죄인지도 모른다.

  이기주의 법칙만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뜻을 헤아리는 사람 몇이나 될까. 너무 작은 일이라고, 내게 직면한 일이 아니라고 모두 먼 산만 본다.

  구약시대에 죄악으로 가득하고 성문란이 극에 달한 도시, 영국의 성서학자 마이클 샌더스 박사가 이끄는 탐사 팀이 사해의 해저에서 그 흔적을 발견하여 확인작업에 들어간 소돔과 고모라성은 단 10명의 의인이 없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황불에 타서 멸망했다. 처음 제시한 의인 50명을 찾는다는 것이 불안했던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5번을 거친 흥정으로 단 10명으로 줄였지만 그곳에는 그 열 명의 의인도 없었다. 오염된 환경에서는 의인이 자리할 곳이 없는가보다.

  서기 79년 베수비오화산의 폭발로 부패와 환락이 절정에 달한 폼페이와 헤르클라네움이 용암과 잿더미에 매몰되었다. 로마시대에 고관과 부유한 상인들의 별장지였던 그 곳은 퇴폐의 중심지였다. 18세기 이후에 발굴되어 화산 폭발 당시의 모습이 화산재 속에 화석으로 남아 있다. 처참한 퇴폐와 환락의 최후.

  하늘의 징벌에서 세상을 구할, 단 10명의 의인이 없는 것은 오늘도 마찬가지다. 천형(天刑)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심장의 시대에, 화석이 되어버린 폼페이의 최후를 보며 무엇을 느낄까.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오늘의 하느님, 공정한 상벌을 기대할 수 없는 하느님을 조롱하며 위안의 말을 찾는다.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일까. 조화가 더 생화 같은 세상에서, 가짜가 더 당당한데 어찌 제대로 겨냥할 수 있겠는가. 

  절반쯤 감은 눈으로 살아야 편안할 이 시대에 이제는 아주 멀리 멀리서 공과를, 상벌을 구분할 기준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뿌린 대로 거두기는 더 오랜, 피안의 시간이 지나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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