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더 이상 무섭지않다

칠부능선 2006. 6. 12. 23:16
 

        더 이상 무섭지 않다


                                                          노 정 숙

 


  점심을 먹다가 갑자기 목이 멘다.

  엄마가 좋아하는 황태구이가 내 눈을 어리게 한다. 서둘러 일어나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 입구에 차를 세우고 참사랑묘역을 향해 걷는다.

  오른편에는 말라버린 수로가 물도 없이 구차한 모습으로 따라오고, 왼편에는 오래된 묘지의 치장이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둥글게 아치를 세워 그 안에 여러 모양의 성모상을 모시고 아치 양옆에는 들장미를 심었다. 마른 꽃의 흔적이 한창 때의 화사함을 그리게 한다. 대리석 아기천사상 둘이 상석 양옆을 지키고 있는 박물관을 닮은 묘지다.

  돌화분 위에 울긋불긋한 꽃이 애처롭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 만발했다. 시들지 못 하는 꽃은 얼마나 슬픈가. 꽃은 적당한 시기에 이우는 아쉬움이 있이기에 아름답지 않은가. 죽음이 없는 삶도 마찬가지다. 죽음이 없다면 사는 것이 얼마나 가혹할까. 탐욕은 한이 없어, 쌓고 쌓는 일에 끝없이 매달리며 묶여서 산다.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염려하는 마음이 커진다. 노인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은 노후에 대한 대비가 없는 탓이다. 보낼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존엄성을 지키며 사는 삶이 질이 문제다.

  잘 사는 것은 좋은 죽음을 위한 준비다. 좋은 죽음이 무엇일까.

  넓은 묘역에 커다란 상석, 화려한 비석 위에 빽빽하게 적혀있는 업적들. 그 빛나는 깃발과 화려한 간판들이 그에게 무엇을 줄까. 성공한 후손들을 위안하고, 그들의 허영심을 채우는 것에는 적당하다.

  지나가는 눈길을 붙들고 말 걸어오는 묘지들과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조금 외진 곳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묘역을 오른다.

  땀이 등에 배일 무렵 한 줄기 바람은 머리를 날리며 기척을 한다. 

  누군가가 다녀간 흔적으로 하얀 국화가 누렇게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며 얌전히 기대어있다. 한 겨울에도 묘지 곁을 지키는, 늘 푸른 나무들이 있어 조금은 위로가 된다. 

  납골당 작은 비석에는 여물게 음각 된 이름들이 달동네 이웃처럼 붙어 있다. 정 많은 엄마는 이곳에서도 많은 사람들과 불편 없이 가깝게 지내고 있나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쾌적함을 누릴 수 있는 절대의 거리가 이곳에는 없어도 되는가 보다.

  고축생, 정귀녀. 최말봉 이런 정겨운 이름들을 입 속으로 되뇌며 베라노, 요한금구, 레문도 같은 낯선 세례명도 소리 내어 귀에 익혀본다. 엄마의 이웃을 나도 친하게 불러야하니까.

  바람처럼 떠돌며 뿌리내리지 못한 아버지, 감성이 시키는 대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비난이나 원망 듣지 않고 사신 아버지. 아버지의 그 당당함은 속 깊은 아내의 덕 이였다는 것을 아버지는 아실까. 

  표현하지 못하고 쌓인 것이 많았을 엄마가 밝은 얼굴로 산 것은 처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낙천적인 성격 때문일까. 일찍이 체념하신 것일까. 늘 아버지한테 잘 하라고 하던 엄마의 그 맹목적인 사랑과 초월에 가까운 헌신이 안타까웠다. 

  자식에게 너그럽고 따뜻한 엄마.

  이웃에게는 바다를 연상할 만큼 포용력이 많은 사람으로 살다간 엄마. 

  마지막 주검까지도 의과대학에 기증한 엄마. 

  그곳에서도 늘 들어주고, 나누어주는 것이 엄마의 역할일까. 이제는 그 역할에서 벗어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투정 잘하고 불평도 하는 그런 역할이었으면 좋겠다. 

  엄마한테 받기만 한 사랑을 주는데 게으른 나는, 다시 성인이 된 딸이 외할머니를 닮아 내게 엄마노릇을 하려든다. 딸한테 딸 노릇을 하는 철없는 엄마로 사는 나의 영악함을 엄마는 아직도 모르리라.  영원히 모를 것이다.

  딸이 또 딸을 낳을 수도 있는 이 나이에 이제야 무섭지 않다. 엄마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 세상이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하다고 해도, 배신은 늘 가까이에서 싹트는 것이라고 해도. 내게도 약속된 죽음이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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