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고래 / 천명관

칠부능선 2024. 4. 26. 18:32

빌린책의 장점은 빨리 읽고, 촘촘히 읽게된다.

권 동지가 수업에 다루면서 가져온 책을 빌려왔다. 작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면서 화제가 되었다.

이미 2004년 문학동네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극칭찬을 받았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스타일이라고. 이 작가는 전통적 소설 학습이나 동시대의 소설작품에 빚진 게 별로 없는 듯하다는 평은 아리송하다.

어쨌거나 가독력이 좋다.

2023. 4월 60쇄판인데 200페이지 넘게 단숨에 읽었다. 눈이 침침해서 책갈피를 끼우고 눈을 감았다. 다음날 아침부터 3부 춘희의 신산한 삶을 읽다 370쪽 쯤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끝을 보기에는 마음이 너무 무겁다.

일어나서 나갔다.

열무 1단, 얼갈이 1, 무우 1개, 배추 한 통. 오이, 부추, 쪽파, 파... 들을 사와서 오이소박이와 열무김치를 담으며 머리를 식혔다. 오랜만에 살림인데도 손에 익어 척척이다. 찹쌀풀을 쑤고, 냉동실의 홍고추와 마늘, 배, 무, 새우젓을 갈고.. 까나리액젓으로 간을 맞춰두고, 절인 열무 얼갈이와 끓인소금물에 절인 오이를 채반에 받쳐두고. 4시 국선도를 다녀와서 버무렸다. 완전 살림 선수다. 칭찬 잘 해주시던 어머니가 안 계시니 셀프 칭찬이다.

어쨌거나 한뜸 시간을 두고 다시 <고래> 잡고 끝냈다.

자주 등장하는 변사의 목소리가 코믹하기도 하다. 시골 장터에서 구성진 변사의 이야기를 듣는 듯.

잠깐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이 떠오르는데 그 책에 비하면 <고래>는 아주 친절하다. 우선 등장인물 이름이 서사를 거의 말해준다. 박색 노파, 애꾸, 금복, 춘희, 文, 칼자국, 걱정, 약장수, 코키리 점보, 쌍둥이 자매...

*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부둣가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갈잡이닌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인 칼자국' (110쪽)

칼자국이 나올 때마다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 게 웃긴다. 게다가 게이샤에게 손가락을 바친 그의 순애보, 죽음까지도 황당하고 억울하다.

왜 여긴 행복한 사람이 없는건지. 모두 처절하게 불행하다.

배경으로 등장하는 3년간의 북쪽과 남쪽의 전쟁과 그후 등장한 장군님의 세상, 아름다운 나라 - 미국을 숭상하며 펼쳐지는 이야기가 판타지에서 그나마 현실감을 준다.

* 새벽마다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사람들은 투덜대면서도 달콤한 이불 솔에서 기어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군은 사람들의 잠을 빼앗아갔고 세상은 더욱 피곤해졌다. (220쪽)

외설이냐 예술이냐 할만한 성적표현이 많이 나오지만, 전혀 외설스럽지 않다. 심지어 여자가 남자가 되는 황당한 설정까지도. 모두 안쓰러운 인간군상이다.

금복이 여자일때는 예지력이 있는 천하여장부였는데 남자가 되고는 무능하고 찌질해진다.

작살의 법칙, 거지의 법칙, 흥행업의 법칙, 구라의 법칙, 유언비어의 법칙, 만용의 법칙, 헌금의 법칙, 자본주의의 법칙, 사랑의 법칙, 토론의 법칙, 독재의 법칙 ... 왠지 말놀이 같은 세상의 법칙.

* 춘희는 자신의 인생을 둘러싼 비극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녀의 욱체는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천형의 유니폼처럼 단지 고통의 뿌리에 지나지 않았을까? ....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여줬던 불평등과 무관심, 적대감과 혐오를 그녀는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었을까? 혹, 이런 점들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독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 이야기꾼이 될 충분한 자질이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란 바로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만이 세상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한 줄 또는 두 줄로 세상을 정의하고자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명제가 그런 것이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춘희는 평등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310쪽)

* 단단하던 근육은 탄력을 잃고 이마엔 굵은 주름이 잡혔다. 혼자 벽돌을 굽는 동안 그녀는 점점 더 고독해졌으며 고독해질수록 벽돌들을 더욱 훌륭해졌다. 공장 뒤편의 너른 벌판은 점점 더 많은 벽돌로 채워져갔다. (407쪽)

나는 다시 첫 장에 오래 머문다.

* 훗날,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 세상에 흔히 '붉은 벽돌의 여왕. 으로 소개된 그 여자 벽동공의 이름은 춘희(春姬)이다. 전쟁이 끝나가던 해 겨울, 그녀는 한 거지 여자에 의해 마구산에서 태어났다. 세상에 나왔을 때 이미 칠 킬로그램에 달했던 그녀의 몸무게는 열네 살이 되기 전에 백 킬로그램을 넘어섰다. 벙러리였던 그녀는 자신만의 세0계 안에 고립되어 외롭게 자랐으며 읪아버지인 文으로부터 벽돌 굽는 모든 방법을 배웠다.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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