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하늘 비자 / 송마나

칠부능선 2023. 1. 3. 19:46

송마나 선생님은 몇 해 전, 관여 선생님의 희수 깜짝 파티에서 한 번 뵌 적이 있다.

철학 수필 그룹이라는 것, 글이 비상하다는 것, 멋진 모자를 쓴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다.

첫 작품 '배꼽'을 통해 귀한 딸로 자랐고,

아버지가 '마음의 꽃' 을 쓴 수필가셨다는 것, 함께 쇼핑하는 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래 숙성된 언어의 폭죽이 곳곳에서 터진다. 나는 금세 몰입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갔던 '세이렌들의 바위'는 참 허술했는데...

이오스 섬에서 맞은 일출만 떠오르는데, 그곳에 호메로스의 무덤이 있었다니...

내가 밟았던 이국의 지명들과 내가 읽은 작가들을 만나는 기쁨과

내가 모르던 철학과 신화의 물결을 타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공부를 일깨우는 수필이다. 읽고 싶은 책 메모가 늘어났다.

웅숭깊은 작품들에 깊이 절한다.

 

* 물의 혀는 울퉁불퉁한 돌덩이들을 핥고 모서리를 갉느라 얼마나 닳고 찢어지며 피를 흘렸을까. 내 안에 남아 있는 가시가 뽑혀 나가는 날, 나도 저 유연한 강물처럼 햇빛에 빛날 수 있으려나. (23쪽)

* 그르니에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고 했다. 나는 글을 쓸 때 세 번 무섭다. 무섭다는 표현을 두렵다는 언어로 살짝 바꿔야 그나마 나머지 글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쓰기 전 글감을 삭힐 때, 바다에 닿지 못하는 언어로 억지 물결을 만들 때, 독자들이 나의 글을 슬쩍 읽고 가볍게 버릴 때, 나는 두렵고 부끄럽다. 나의 수필은 언제쯤이나 밤의 장막을 거두고 사물들을 깨어나게 할 수 있을까. (51쪽)

* 히말라야 설산들이 파란 하늘에 끝없이 늘어섰다. 이때 하늘은 세상의 절대 배경이다. 그 무수한 봉우리들 사이로 에베레스트가 우뚝 솟아 있을 터, 나의 눈길은 그곳의 베이스캠프를 찾아 헤맸다.

에베레스트산은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티베트 팅그리스 검문소는 세계에서 몰려온 산악인들을 걸러내고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랜드로버 자동차 30여 대를 타고 온 사람 가운데 동양 여자는 나 혼자였다. 고독했다. 산에 오를 때마다 늘 고독했다. 높은 산에 오를수록 정상은 하늘을 더욱 파랗게 물들였기 때문이다. (68쪽)

* 황홀한 순간에 눈물이 흘러나온다. 번개의 섬광이 번쩍일 때 눈은 저절로 감겨 최초의 밤과 같은 암흑 속으로 빠져들며 그만 눈물을 흘린다. 어두운 몸속에 숨어 있던 정액도 분출한다. 눈물과 정액은 기원의 샘이다. 황홀함 느끼기와 눈물 흘리기 사이에는 선을 긍ㄹ 수 없다. 독서, 글쓰기, 음악, 회화, 활짝 핀 벚꽃을 관조하는 것은 섬광처럼 솟구치는 황홀경을 안겨준다. (95쪽)

* 백합 百合의 '백' 자는 흰 白 자가 아닌 일백 百자다. 백 가지 모임이라니. 백합의 알뿌리가 백 겹으로 둘러싸인 비닐 줄기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백합의 강한 향기는 그 백 겹 비닐 속에 꼭꼭 숨어서 우리의 영혼을 혼미하게 하나 보다. 흔히 백합을 흰색 꽃으로 생각하지만 원래 꽃잎 색깔이 하얀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흰 백합이 대중화가 되도록 일부러 원예작물로 키웠던 것이다.

청초하고 순결한 흰 백합이 겉 희고 속 검은 백로처럼 느껴진다. 어디 백합꽃뿐이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달콤한 향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183쪽)

* 생텍쥐페리에게 명상의 결론은 행동을 통한 실천으로 나타난다. 명상은 정신이고 행동은 육체라는 도구로 인하여 드러난다. 이러한 깨달음은 체험을 통해 인본주의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아놀드 토인비가 쓴 《역사의 연구 》 에서 "문명의 성장은 도전에 대한 응전에 기반을 둔다."라고 했듯이 개인은 행동 속에 참여해야 한다. 이런 행동은 직분이나 유대민족 간의 동료애를 느끼면서 점차 개인적인 소승의 경지를 초월하여 우주적인 대승의 경지로 나아간다. 이 대승으로의 승화가 화엄의 보살사상이라 할 수 있다. (2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