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김선우의 사물들 / 김선우

칠부능선 2022. 3. 5. 12:45

잠이 오지 않아서 새벽 3시까지 읽었다.

잠이 오면 좋고, 잠이 오지 않아도 이렇게 시간을 보내니 좋다.

가끔 떡실신도 하니 걱정할 건 없다. 

눈이 너무 아플때는 책 읽어주는 유튜브를 틀어놓고 눈 감고 있으면 어느새 잠들고 ...

 

오래 전, 내가 문단에 입문했을때 오선생님 따라서 간 명동 어딘가에서 '해외이주민을 위한' 공연에서 김선우 시인을 만났다.

문인과 가수의 콜라보다. 그때 해외에서 노동자들이 막 들어올 때였다. 

고은 시인과 이야기 하면서 중간 중간에 가수 이은미가 노래를 했다. 

그때 사회를 보던 까칠한 시인의 모습, 이은미의 품 너른 성품을 느꼈다. 대담은 아슬아슬 했고, 노래는 좋았다. 

그래, 김선우 시인도 아주 젊을 때다. 

이 책을 보니 그간 흐른 시간이 느껴진다. 민감함은 여전하지만 많이 둥글어진 느낌이다. 

사물들과도 눈맞추는 시간이 온 것이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생각한다. 

'이 정도 늙으니 참 좋구나.' 

 

 

 

 

 * 이 세상 어디에도 

  나보다 가까운 것은 없도다.

  그토록 소중한 것 남 또한 그럴지니

  제 자신을 아끼는 이

  남 해하지 않으리

 - 붓다의 게송

 

거울은 겹겹의 빛을 버무려

어둠을 달랜다 

(25쪽)

 

* 상처가 오롯이 상처로 깊어지면 상처에서 꽃이 피기도 한다는 것을, 못의 뿌리가 닿는 자리들이 간질거리며 무엇인가 자꾸 피워내고 있다는 것을, 상처 난 살갗에 새살이 돋을 때처럼,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한 겨울나무 가지 끝처럼, 못 견디게 간질거리는 어떤 그리운 느낌이 못의 뿌리로부터 대지로 번져나가는 것을, 그 황홀한 통증의 뿌리들은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자기 무게의 수십 배가 넘는 사물들을 지탱한다. 못들은 힘이 세다. (65쪽)

 

* 계절로 치자면 봄과 가을에 그것은 햇볕에 가깝고 여름의 그것은 햇빛에 가깝고 늦가을부터 겨울을 지나 초봄에 이르는 그것은 햇살에 가까운 듯하다. 봄가을에 촉각으로 먼저 느끼는 그것은 햇볕이라는 말이 지닌 적당한 따뜻함을 즐기게 한다. 여름날의 햇빛은 그 앞에 살같을 봉헌하기가 쉽지 않은, 일단은 피해야 할 거리를 유지하기 십상이고, 쌀쌀하거나 몹시 시려운 겨울날을 지나면서 햇살은 그 살의 거처인 양지로 나를 불러들인다.  (111쪽)

 

* 자기의 잔을 가지자

  술은 봄 술이 제격이다. 내게는 그렇다. 벚꽃이나 사과꽃 만발한 나무 아래서 달밤에 마시는 술도 일품이고 좋은 한낮에 꽃나무 아래서 마시는 낮술도 봄이라야 제격이다. 봄비 내리는 날도 마다할 수 없겠다. 술의 종류를 떠나 꽃나무 아래서 마시는 술은 잔술이 제격이다. 캔맥주를 하나 사서도 캔째 마시는 것보다 잔에 따라 홀짝거리는 게 좋다. 적어도 봄에는 말이다. (152쪽)

 

* 더 빨리 어떤 목적지에 닿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펴 들게 된다면 서둘러 그 지도를 버려야 한다. 자기 앞의 생을 찾아가는 그 모든 과정들이 얼마나 애틋한지를 보여주는 징표로서의 지도는 '거기'를 꿈꾸게 할 뿐만 아니라 '여기'를 돌아보게 하는 아주 느린 흔적들의 집이기 때문이다.  (188쪽)

 

* 텔레비젼이나 신문을 보다가 마음이 착잡할 때가 많아진다. 우리 사회의 미디어는 급기야 노화를 '질병'으로 취급하는 지경에 이른 듯하다. 암 투병을 하듯 싸워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늙어감'의 시간성을 전락시킨다. 

...  젊음은 찬란한 매혹이지만 젊다는 것만으로 아름다움이 획득되는 경우를 나는 별로 보지 못했다. 오히려 한 인간을 뿌리부터 송두리째 공명시키는 아름다움은 거의 언제나 잘 늙어가는 육체로부터 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아름답기를 원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름답게 늙어가기를 원한다. 아름답게 늙어가는 이들을 바라볼 때 행복하다.

(211쪽)  

 

* 시간아, 나를 잘 만져다오

  어둠의 숨결로 차려놓은 빛의 방, 은밀하고도 적나라한 사진기 앞에 서서 때때로 묻는다. 너의 몸에 스미는 빛들이 나의 어디에서 흘러갔는가. 시간아 나를 잘 만져다오, 나도, 시간을 잘 만져줄 수 있기를 원한다. 빛의 방을 통과하는 치렁치렁한 시간의 주름을 눈부시게 바라볼 수 있기를.  (212쪽)

 

* 내 생활 속에서 휴대폰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어느 날, 나는 와삭! 휴대폰을 깨물어 먹으며 새로 놓은 징검다리를 랄랄라 건너갈 것이다. (224쪽) 

 

 

'놀자, 책이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죄 / 오정순 디카시집  (0) 2022.03.22
용재총화 / 성현  (0) 2022.03.09
사실들 / 필립 로스  (0) 2022.03.01
아버지의 유산 / 필립 로스  (0) 2022.02.23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김지수  (0) 2022.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