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 최승자

칠부능선 2022. 1. 7. 20:49

책을 읽기도 전에 표지 사진에서 '헉' 숨이 막힌다.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 

 <시인의 말> 전문

 

 

* 다시 젊음이라는 열차를

 

  20대 중간쯤의 나이에 벌써 쓸쓸함을 안다. 깨고 나면 달콤했던 예전의 쓸쓸함이 아니고 쓸쓸함은 이제 내 머릿골속에서 중력을 갖는다. 쓸쓸함이 뿌리를 내리고 인생의 뒤켠 죽음의 근처를 응시하는 눈을 갖는다.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보이지도 않게 조금씩 망가져가고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1976)

(13쪽)

 

 

*유년기의 고독 연습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이성 간의 정신적인 순수한 사랑이라는 것에 눈떴다. 그리고 한 가지 결심을 했다. 나도 어서 커서 아름답고 그리고 (그 다음 단어가 중요하다) 슬픈 사랑을 해보리라고, 농담처럼 얘기하자면, 어릴 적의 그 결심은 후에 실제적인 결실을 거두어, 나는 첫사랑에 훌륭하게 실패했다. (1987)

(105쪽)

 

 

*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시가 인간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쓰는, 시를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시가 시를 쓰는, 시를 생산하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인 내게 무엇이 될 수 있을까. (1989)

(124쪽)

 

 

*최근의 한 10여 년

 

 내 병의 정식 이름은 정신분열증이다.

 거진 다 나았어도 아직은 약을 먹어야 한다.

 12년째 정신분열증과 싸우다보니 몸도 마음도 말이 아니다.

 

정신과 입원과 퇴원을 반복한 것은 한 5년.

퇴원하여 두세 달 후에 보면 약을 안 먹고 밥도 안 먹고 있는 꼴을 보게 된다. 그럴 때 외숙이 오시면 한번 휘둘러 보고 일견에 상황을 눈치채고 강제로 입원시킨다. 다시 입원하면 두세달 후에 좀 볼만한 얼굴이 되어 퇴원해 나온다. 이 짓을 최근 몇 년간 되풀이하고 있다.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 

...

 나를 병에 지치게 한 것들에서 손을 뗀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시는 그대로 쓸 것이고, 그러나 문학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나는 이미 옛날의 내가 아니어서 다른 꿈을 슬쩍 품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어떤 시원성始原性에 젖줄을 대고 있는 푸근하고 아름답고 신비하고 이상하고 슬픈 설화형식의 아주 짧은 소설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2010)

(175쪽)

 

 

 

  1989년 시인이 처음 출간한 책이다. 2014년 시인에게 재출간을 요청한 책이다. 2019년 시인이 재출간을 허락한 책이다. 거처를 병원으로 옮긴 시인이 2021년 11월 11일 섞박지를 순무 써는 듯한 큼지막한 발음으로 수화기 너머 또박또박 '시인의 말'을 불러준 책이다.

- 책 띠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