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나를 밟아주세요 / 노정숙

칠부능선 2021. 11. 2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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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밟아주세요

노정숙

 

 

허술하던 내 몸이 단단해졌다.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사람들 덕이다.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요즘 들어 왜 그리 나를 좋아하는지.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말에 만보기를 차고 발걸음 숫자를 세는 사람도 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불어도 상관없이 내게로 향하는 사람들 때문에 몸살이 날 지경이다.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르지만 사람의 숨결을 가까이 느끼는 지금 행복하다.
내 오른쪽에는 청정하지는 않지만 물이 흐르고 왼쪽에는 잘 다듬어진 잔디와 벌개미취가 한창이다.
꽃도 없이 귀여운 애기땅빈대, 보일 듯 말 듯 수줍은 매듭풀이 잔잔한 눈짓을 보내고 있다.
 
바라만 봐도 흐뭇하다.아장걸음 아기를 데리고 나온 젊은 엄마의 조심스런 발걸음엔 살짝 긴장한다.
중간고사를 끝내고 나온 학생들의 장난기 어린 발걸음에 덩달아 기분이 통통 튄다. 걷는 건 살아있다는 기척이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 걷다 보면 무겁던 고민거리가 가벼워진다고 한다. 걸으면 몸 근육과 함께 생각의 근육도 생긴다.
근육으로 넓힌 생각에 날개가 돋을 것이다.
언젠가 그 날개를 펼쳐 세상을 더 깊고 다양하게 볼 것이라 기대하며 난 어깨를 으쓱거린다.
지금 내 발치에 붙어서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은 모시풀이다.
멋진 이름값도 못하는 환삼덩굴이 질기게 늘러 붙어서 기분이 나빠지려한다.
촉수를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이나 치맛자락을 노리고 있다.
호시탐탐 긴 갈퀴손을 뻗쳐 잡아당긴다. 살에 닿는 껄끄러운 촉감은 보기 싫은 사람의 손길 같다.
 
가랑비가 순하게 내리던 날 나는 모시풀을 기어이 밀어내려고 온몸에 힘을 주었다.
순간, 이 못난 것에게서 척박했던 내 모습이 겹쳐진다. 슬그머니 힘을 풀었다.
나도 처음엔 돌투성이 흙바닥이 아니었는가. 사람들의 고운 발길이 나를 다지고 눌러 길이 되지 않았는가.
무심히 걷던 사람들은 작은 돌멩이를 보면 한쪽으로 쓱 밀기도 하고 걷어차기도 하며 내 이마를 훤하게 해주었다.
그때 이는 잔 먼지도 얼마나 고마웠던가. 질긴 환삼덩굴도 쓰임이 있을 게다.
거칠고 못났지만 함께 가야겠다. 내 허리께에 있는 허술한 개미굴 앞에는 먹이를 모으는 일개미들이 분주하다.
투박하지만 자연스러운 풍경화다.
 
머지않아 변할지도 모를 내 모습에 두려움이 인다.
아랫동네 친구들은 온몸에 검은 콜타르가 뒤집어씌워졌고, 바로 옆 동네 친구는 초록색 우레탄으로 변장을 했다.
자전거 전용도로라든가 인라인 전용도로라든가 사람들은 이름 붙이기를 좋아한다.
인간은 자기들의 용도에 맞게 친구들 모양새를 바꿔놓고 좋다고 한다.
훤히 뚫린 고속도로나 말끔하게 포장된 국도나 오솔길, 모든 길에는 그만의 쓰임이 있다.
그러나 나는 흙냄새 풍기는 순한 내 모습이 좋다.
 
내 모습에서 일찍이 ‘희망’을 읽은 이가 있다.
들풀과 자갈로 가득하던 벌판에 많은 사람들이 한발 한발 발자국을 찍음으로써 비로소 길이 드러나는 것을 보았으리라.
처음에 막막하던 마음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희망 없이 어찌 하루하루를 살아내겠는가. 아무런 장식 없는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오래 남고 싶다.
누구든 나를 보면서 소소한 희망을 떠올리면 좋겠다 

 

 

대전청소년 웹진 2021.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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