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노천탕에서 / 노정숙

칠부능선 2021. 12. 8. 16:11

 

노천탕에서

노정숙

 

 

마을버스 은수랑 두 번째 여행 중에 학가산 온천을 들렀다. 안동시에서 만들었다는데 깔끔하고 쾌적하다. 샤워를 하고 노천탕으로 갔다. 넓은 탕에는 두 어르신이 앉아 있다. 서로 어디에 사느냐며 수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 다 안동의 종손며느리로 연륜이 곱게 내려앉았다. 한 분이 손을 내밀며 화려한 네일아트를 자랑하신다. 딸이 생일선물로 해줬는데 앞으로 계속 해야겠다고 하신다. 고우시다고 한껏 칭찬을 해드렸다. 곁에 계신 갸름한 얼굴의 친구 분은 예쁜 건 다 지나갔고, 아픈 곳이나 없으면 좋겠다고 한다.

 

1900년생 미국의 초상화가 엘리스 닐은 80세에 옷 벗은 자화상을 그렸다. 파란색 줄무늬 의자에 앉아 흰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손에는 붓과 흰 천을 들고 있다. 평론가들은 흰 천이 늙음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의미라고 하지만 나는 그림을 수정하는 용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늙음과 죽음은 선택 사항이 아니지 않은가. 중력을 거스를 수 없는 몸은 아래로 쳐서 있다. 늘어진 가슴에 웃음기 없는 입, 근육을 잃은 다리는 휘청거릴 듯하다. 안경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매만 분명하다.

누드는 예술적 느낌이나 관념을 바탕으로 여체를 에로틱하게 그린 그림이다. 주로 남성 중심 시각이다. 이충열의 화가들은 왜 비너스를 눕혔을까?를 읽은 후 나는 누드와 벗은 몸을 구별하게 되었다. 아름다움을 배제한 그냥 벗은 몸에는 적나라한 삶의 이력이 새겨있다. 엘리스 닐이 그린, 벗은 임산부의 모습은 신체적 변화와 함께 다가오는 출산의 공포와 정서적 불안이 들어있다. 곤고한 표정이 너무 사실적이라 위태롭게까지 느껴진다. 인간의 내면이 드러나는 벗은 몸의 숨결에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오래 전에 본 누드비치의 풍경은 어땠는가. 여자도 남자도 벗은 동네에서 벗은 몸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젊은 가슴 옆에서 늙은 가슴은 세월만큼 내려와 있고, 살아낸 시간만큼 출렁이는 살집이 자연스러웠다. 오직 연륜을 헤아리게 되는 벗은 몸이 시시했다.

누군가 노인의 몸도 병든 몸도 아름답다고 했다. 의복이 없는 몸이 되면 그냥 자연처럼 아름다워진다고 한다. 늙은 나무가 젊은 나무보다 덜 아름답지 않은 것처럼. 인간의 추함이 의복의 추함이라고 한 말의 속뜻을 생각한다. 인간을 추하게 하는 의복이 무엇인가. 엘리스 닐이 벗긴 것은 인간의 본질을 가리는 의복이 아닐까.

엘리스 닐이 그린 앤디워홀의 초상화는 충격적이다. 자기 신체를 드러내는 걸 극도로 꺼리며 벌거벗는 건 내 존재에 대한 위협이라고 말한 워홀이 엘리스 닐 앞에서 상체를 벗었다. 68년에 그는 급진적 여성주의자인 발레리 솔라나스에게 그가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다는 이유로 저격당했다. 그때 생긴 복부에 깊은 수술자국과 그 사건 후에 늘 두르고 있는 코르셋이 생경스럽다. 은회색머리에 눈을 감고 두 손을 다소곳이 모았다. 평소 알던 팝아트의 제왕, 엔디워홀의 이미지와 거리가 있다. 엘리스 닐은 엔디워홀의 의복을 벗기면서 그의 내면을 이렇게 읽었다. 누구의 인생도 지배할 수 없는, 다만 상처투성이 영혼의 쇠해가는 남자의 몸이다. 그럼에도 감은 눈을 통해 영적으로까지 보이는 건 예술의 힘인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은 시간과 함께 소멸한다. 흔적 없는 소멸도 아름답다. 소멸로 가기 위한 노정이 늙음이다. 늙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라는 언명이 전해지는 그의 초상들이 서늘하다. 치열했던 삶의 기록은 풍화를 이겨낸다. 죽은 후에도 남은 자의 기억 속에 있다면 아주 죽은 건 아니다. 84세로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린 그를 나는 경이로운 마음으로 불러낸다.

 

노인이 되어서도 여자로 살고 싶다는 분과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어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쪽에도 끄덕이며 저쪽에도 공감을 했다. 아프다고 해도 친구와 노천탕에 올 수 있고 자신을 가꾸는 재미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잘 살고 있는 거다. 어른으로 산 시간을 헤아려 보면 부린 몸이 여기저기 삐걱거리는 건 당연하다. 누구든 가볍게 아플 때는 운동이나 약으로 다스리고, 무겁게 아플 때는 시술 혹은 수술로 달래며 삶을 이어간다.

얼마 전에 친구가 물었다. 우리 부부가 요즘 제일 많이 하는 대화가 무언지 아느냐고. 나는 눈만 껌벅이며 바라봤다. “? ?” 이런 거라고 한다. 서로의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한다는 거다. 맞아, 맞아 폭소를 터트리며 동감했다. 앞으로는 동문서답이나 마이동풍과도 친해져야 한다. 버럭질이나 푼수짓에 바로 반응하면 안 된다. 굼뜬 몸과 어두워진 귀에 맞춰 절반만 알아듣고 나머지는 관성에 맡겨야 한다. 아직 내 몸을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걸 갸륵히 여기며 느릿느릿을 여유로, ‘어리바리도 위트로 품 넓게 받아야 한다.

마을버스 은수도 나이로 헤아리면 벌써 폐차를 하고도 남는 연식이다. 그러나 부품을 갈아주고, 어르고 달래며 세계 일주를 하고 와서 지금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달리고 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는 곳이 노천탕이다. 이 호사로운 시간을 나는 다가오는 노쇠를 헤아리는 데 썼다.

오라! 늙음이여, 나중 내내 친할 벗이여.

 

<수필미학>2021년 겨울호 (통권34호)

 

 

                                         뜬금없는 네잎클로버 화분이지만.... 늙음의 행운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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