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거리두기 시대> <25시는 없다> 석현수

칠부능선 2021. 9. 12. 10:18

대구의 석현수 선생님이 수필집과 시집을 동시에 출간하셨다. 

거의 일년에 한 권을 묶는 열정적인 작가다. 단숨에 다 읽었다.

오래 전 분당에서 함께 하던 시간을 떠올리니 변함이 없다. 여전히 꼿꼿한 선비정신이 곳곳에 서려있다.

공군사관학교를 나오셨는데도 전직이 선생님폼이시다.  선생님의 많은 수필집 중에 <선생 출신입니까>도 있다. 

어느덧 75세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가붓한 체구에 해맑은 웃음을 웃으시던 모습이 선하다. 

퇴직 후, 새로이 들어선 작가의 길에 문장과 벗하며 치열하게 궁구하는 모습이 귀감이 된다.  

대구 국제마라톤 비대면 대회에 도전한 이야기며,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 사연에서 크게 끄덕였다.

피터 비에리의 <삶의 격>을 읽고 쓴 '난장이 던기기'의 충격에 공감한다. 나도 그것에 대해 쓴 글이 있다.

책을 덮기 전 서문으로 돌아왔던 기억도 새롭다. 

소소한 일상에서 깊은 눈으로 사색하고 성찰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시집 <25시는 없다>를 읽으며

문인수 '시인부부를 위하여'에서 울컥했고, 딸의 생일날에 쓴 세 공주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절절하다. 

삼일로 '창고 극장'을 읽으며 명동성당 옆 언덕길에 있던 그곳을 자주 다니던 시절을 떠올렸다.

솔직하고 반듯한 시선이 시에도 잘 녹아있다. 

움켜쥐었던 주먹을 펴니, 은빛 모래가 소르르 흘러내리는듯 여유롭고 평안하다.  

선생님을 뵌 듯 반갑게 읽었다.

 

 

 

 

* 무상無賞이 상팔자

 

 

수상受賞 소식에 눈이 번쩍 떠졌다

이런 횡재는 곧 실망으로

눈 감아야 했다

상금 타면 그동안 챙기지 못한 식구

입술연지라도 하나 뽑아줄까 했는데

행사비 찬조 조로

自滿員을 내란다

잘못 들었나, 준다가 아니고?

이런 부자 될 일

그런 큰돈을

무슨 핑계 대고 마누라 것 우려내나

기업체 대표에게 갈 전화

잘못 걸려온 걸까

백씨 가문 애 이름 부르듯 하다니

문단에 올린 이름 잉크도 채 마르지 않았는데

글은 함량 미달이고

문단 인지도 전혀 없음

설상가상 사회적 경제활동도 없어진 나이

땅 땅 땅 결론 내렸다.

자격없음

부상副賞을 받는 것은

고전문학

금일봉 내고 가져가라면 현대문학

경력란에 당당하게 '상 없음'이라 쓸 수 있는

보짱 편한 사람으로 남기로 했다

이럴 땐

무상無賞이 상팔자.

 

<25시는 없다> 21쪽

 

 

 

 

* 왜 거기서

 

 

목덜미 터럭 하나

네가 왜 거기에?

아무리 뽑아도 돋아나더니

이제는 하얗게 세어 덜 성가시구나

순해진 한 올 흰털이여

너도 네 주인 닮아

성질 죽일 때가 되었더냐?

 

눈썹 위 왕대 같은 터럭 여럿

너희는 또 왜 거기서?

잘라도 뽑아도 고집불통이더니

이제는 고분고분 꼬리 내리네

착해진 터럭 몇 올이여

이제는 자네들 덕분에

눈썹없다는 소리는 면하고 산다네.

 

<25시는 없다> 79쪽

 

 

 

*비문碑文

 

 

꽃 피어도 바람 불어도

묵묵부답

더위도 추위도 비껴가는

적당한 깊이에 알맞게 누웠다

이승과 저승이

어제오늘 일처럼 가깝다

땅속에서도 침묵은 금

그 많은 군대 이야기 다 묻어두고

달랑 두 줄

전면, 관등성명官等姓名

후면, 모년 모일 모처에서 전사戰士

 

<25시는 없다> 1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