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 그는 동시대를 산 음유시인이다.
역사의 현장에서 아니, 노동의 현장, 소외의 현장에서 뜨겁게 노래했다.
노래 에세이, 노래 가사와 함께 당시의 소회를 들여준다. 시를 읽으며 익숙한 리듬이 떠오른다.
이내 눈가가 축축해진다.
그가 맘껏, 노래를 만들고 부르며 살 수 있었던 것의 절반은 박은옥의 덕이리라. 지향이 같은 반려를 만나는 건 축복이다.
노래가 될 수 있는 시의 어법이 이렇구나, 한 눈에 들어왔다.
정태춘, 박은옥을 가까이 본 것은 30년도 더 된 옛날, 제주 그랜드 호텔 콘서트에서 검은 고무신을 신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너무 오래 못 봤다. 노래는 꾸준히 들었지만... 아, 그의 노래를 멋지게 부르던 사람들까지 떠오른다.
*<윙 윙 윙>
건망증이 좀 있기는 하지만 난 사람의 기억을 잘 믿지 않는다. 특히 자서전 같은 것 .. 물론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도 있기는
할 터이나 사람의 기억은 때로 각색되기도 하고 나아가 왜곡되기까지도 하는 법이니까. 과거를 말하는 건 조심스럽다. (41쪽)
* <한여름 밤>
당시 생활의 솔직한(?) 묘사이다. 피곤에 지쳐 잠든 아내와 몸이 아픈 갓난아기, 그 옆에서 상념에 시달리는 나의 모습...
앞의 언급한 것 처럼 '상상한 것을 그려내는' 작업으로서의 노래가 아니라 체험의 이야기다. 예술가들이 '상상'만 하지는 않는다.
일기도 쓴다. (109쪽)
*<북한강에서>
3집 앨범을 실패한 이후 서라벌레코드사도 대성음반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경영상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이 곳을 들어보신 사장님은
"앨범 발표하기 전에 가사를 신춘문예에 내보자"고 하셨고 난 그저 웃고 말았었다.
우리가 힘들 때였다. 가수로서 잊혀 가고 생계도 어렵던 때, 그러데 이런 고상한 가사를 쓰다니.
역시 비현실적인 인간 아닌가. 허어... (134쪽)
* <빈산>
이 노래가 수록된 앨범을 낸 직후에 어느 교육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난 "이 노래가 내 비극적 서정의 백미라고 생각된다"고 말한 바 있다.
'백미'라는 표현이 일인칭 용어로는 적절치 않은 줄 알지만 듣는 이들이 이런 느낌과 평가를 안 해주니 내가 그렇게 질러서 말했을 법하다.
이런 이극적 서정은 나의 경험으로는 진도 씻김굿니나 그리스의 음악에서 정말 백미를 이룬다. 비극도 카타르시스의 효능이 있다.
....
그런데 이런 비극성은 나의 시대와 관련한 나 개인의 패배감이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그런데 정말 패배한 것일까?
또 만약 내가 생각하는 '시대 정의'가 승리했다면 난 세상과의 불화를 끝냈을 것인가? (259쪽)
* <날자, 오리배 ... >
내가 원하는 소리를 녹음하고 만들어 붙인다. 소리의 원근감, 조형적 배치, 선율과 화성, 효과음, 보컬 솔로와 코러스... 그것들의 배합과
재배치와 리터치... 그렇게 커다란 '소리의 그림'을 그려서 앨범을 냈다.
한동안 안 듣다가 혼자 한적하게 운전하다가 문득 들으면서 "주여, 이걸 내가 만들었습니까? 그게 사실입니까?" (혼자서)
뛰어난 편곡이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다시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앞으로 ... 이런 행복한...
노래 만드는 일... (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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