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하늘과 땅> 산도르 마라이

칠부능선 2019. 2. 8. 17:59

 

 

산도르 마라이의 산문집 <하늘과 땅>을 읽고 있다.

편안한 일상을 짧게 말하는데 근이 들어있다. 쉬이 읽히다가 멈추게도 한다.

 

 

 

 

* 의사

 

성인들의 삶에서 의사는 교사, 근엄하지만 사랑의 마음으로 꾸짖는 부모, 그리고 다른 권위적인 인물의 역할을 서서히 떠맡는다.

마흔 살이 넘어서, 주치의, 이 존경스러운 인물이 음식점에서 가족들과 함께 돼지고기를 구워 먹으며 즐기는 광경을 보는 것만큼

곤혹스러운 일이 없다.

 

 

*관계

 

우리는 모든 인간 관계에서처럼 죽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변덕스럽다. 우리는 한동안 죽은 사람들에게 감격하고 열광하며,

그들이 완벽한 존대, 더없이 지순하고 순수한 초인간적인 이상理想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그들에게 싫증을 내고 넌더리를 치며 불만에 가득 차 공격적으로 그들과 언쟁을 벌인다. 다시 시간이 흐르면 그들을 비방하고

분노에 차 부들부들 떨며 이런저런 일이나 우리의 인생, 행복에 대해 해명하라고 요구한다. 세월이 많이 흐른 먼 훗날 다시

화해하고, 서로를 인정하며 용서하고 사과하면서 다정하게 대답한다. 세상사 모든 일이 인간 운명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도 마찬가지다.

 

 

* 가난한 사람들의 보물

 

몇 주일 전 새로 들어온 일하는 아이에게 거처하라고 부엌 옆 골방을 내주었다. 골방은 사 평방 미터 남짓한 크기로,

접이식 철제 침대를 펴놓으면 꽉 찬다. 소녀는 문에 박은 못 몇 개에 허름한 옷 너너 벌과 소지품을 전부 걸었다.

그런데 '집처럼' 익숙해지고 편안해지자 부끄러워하며 조심스럽게 보물들을 꺼내놓는다. 소녀는 예술품, 인조 대리석으로

만든 여인의 반신상과 작은 인형 하나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보푸라기가 좀 일어난 낡은 비단 쿠션도 하나 있다.

이것이 소녀의 전 재산이다. 그 물건들은 내 마음을 깊이 감동시킨다. 바라보고 있자니 눈물이 솟구친다. 그런 물건들을

과시용 장식품으로 여기는 소시민적인 세계에서 보았다면, 나는 혐오하고 경멸하는 마음으로 외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일하는 아이의 방에서 그것들은 루브르 박물관의 귀중한 예술품들처럼 경건함과 숭배심을 불러일으킨다.

"세상에는 분명 아름다운 것, 경건한 것이 존재한다. 인간은 무엇이든 믿어야 한다. 예술이 없는 삶은 초라할 것이다!"

그 물건들이 말한다.

"살기 위해서는 뭔가 가치있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당황하며 말없이 침묵을 지킨다. 당연히, 보배 없이는 살 수 없다.

 

 

 빛바래고 있는 나의 가치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