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손자야 내 손자야 / 이용휴

칠부능선 2018. 11. 13. 12:50

 

손자야 내 손자야

이용휴

 

 

자기 피붙이는 본래부터 사랑하지만, 남은 자기에게 이익이 있어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너는 내 손자다. 그리고 나는 늙고 병들어 귀와 눈을 너에게 의지하고, 눕고 일어나는 일도 너를 필요로 하며, 서책이며 지팡이 챙기는 일을 네가 도맡고 있으니 그 보탬이 매우 많다. 이는 본래부터 사랑하는 마음에 더하여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자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겸한 것이다. 다만 나의 덕으로 너에게 해 줄 만한 것이 없어서 여기에 옛사람의 격언을 써서 너에게 주노라. 아름다운 너의 자질로 이 말들에 마음과 힘을 다 쏟으면 장래에 성취할 것이 어찌 요즘 우리나라 인물들의 수준에 그치고 말겠는가?

만족할 줄 아는 자는 하늘이 가난하게 할 수 없고, 구하는 것이 없는 자는 하늘이 천하게 할 수 없다. 시름과 고통을 참기는 쉽고, 기쁨과 즐거움을 참기는 어려우며, 노여움과 분노를 참기는 쉽고, 좋아함과 웃음을 참기는 어렵다. 남을 헐뜯는 자는 자신을 헐뜯는 것이고, 남을 성취시키는 자는 자신을 성취시키는 것이다. 천하에는 착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이 없고, 착하지 않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일 하나라도 생각없이 하면 곧 창자를 썩히게 되고,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며 곧 미련한 놈이 되는 것이다. 옛사람에게 양보하면 의지가 없는 것이고, 지금 사람에게 양보하지 않으면 아량이 없는 것이다. 군자에게 있는 변치 않는 사귐을 ‘의’라 이르고, 변치 않는 맹세를 ‘신’이라 이른다. 곡식이 되나 말에 넘치면 사람이 평미레로 밀고, 사람이 분수에 넘치면 하늘이 평미레로 밀어 버린다. 과거에 합격하는 것은 사람의 지기志氣를 길러 주기도 하지만 사람의 선한 바탕을 없앨 수도 있다.

스스로 반성하고 스스로 송사한다. 스스로 강하게 하고 스스로 후하게 한다. 스스로 취하고 스스로 짓는다. 스스로 포악하게 하고 스스로 포기하게 한다. 그러니 자기에게서 말미암은 것이지 남에게서 말미암은 것은 아님이 명백하다. 천 사람이 나를 알게 하는 것이 한 사람이 나를 알게 함만 못하고, 한 세대가 나를 알게 하는 것이 천 세대가 나를 알게 함만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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