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유쾌, 상쾌, 통쾌?

칠부능선 2018. 4. 24. 16:58


유쾌, 상쾌, 통쾌?

노정숙



유쾌

‘열심히’는 내 생활의 명제였다. 

노는 것도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열심히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티비를 볼 때는 노는 손으로 다림질을 하고, 

주방 일을 할 때는 팟빵에서 읽어주는 소설을 듣는다. 최소 시간에 최대 효과를 얻어야 한다. 

생각이나 말과 함께 행동이 나가야 한다. 청소를 하겠다는 말만 하고 냉큼 일어서지 않는 남편을 보면, 답답한 내가 벌떡 일어나 청소기를 돌려버린다.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격하게 솔직한 근심 소멸 에세이’라는 말풍선이 붙은 사노 요코의 책이다. 

특이하고 까칠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기분이 좋다. 도무지 심각한 게 없다. 슬프고 쓰린 이야기마저 쿨하게, 시크하게 던지는 사노 요코는 예쁘지 않고 멋쟁이가 아니라도, 게으르고 실수투성인 사람도 괜찮은 인간이라고 여기게 해 준다. 세상에는 어른 따위는 없다. 

단지 어른인 척하는 이가 있을 뿐이라는 걸 당당하게 말한다. 나도 덩달아 이런 말에 격하게 끄덕거리게 되었다.

요즘 마음과 달리 삐거덕거리는 몸을 의식하며 나이에 맞는 속도를 생각하던 차다. 

침잠과 숙고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에 바람이 훅, 들어왔다. 

잘 노는 일에 순순히 ‘멍 때리기’를 넣는다. 그녀의 솔직함에 힘입어 나도 무엇이건 열심히 하지 않기로 했다. 

느림과 게으름에서 얻을 진수를 그리며 마음이 먼저 설렌다. ‘열심히’를 버리니 두루두루 유쾌하다.


상쾌

십수 년 만에 묵은 먼지를 걷어냈다. 

가구 위치를 바꾸지 않고 살다보니 그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먼지가 한 살림이다.

침대 양쪽에 붙은 조명등과 협탁을 버리고, 위치를 바꾸니 중간크기 카펫을 깔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행거를 버리면서 옷도 몇 박스 추리고 

책꽂이에 넘치는 책도 몇 묶음 내놨다. 쓰지 않는 캐리어 3개와 장롱을 짓누르고 있던 이불과 방석, 쿠션들도 다 내쳤다.

수년 동안 한 번도 쓰지 않은 가방, 그릇, 베란다 창고에 쌓아둔 아버님의 낚시도구, 남편의 등산용품, 포장도 뜯지 않은 이어폰 줄, 어댑터들을 추방해 버렸다. 

지금껏 먼지 속에서 쓰레기를 안고 산 셈이다.

야물게 스크랩 해둔 자료들과 학생 때부터 쓴 일기장과 편지들, 사진까지 점찍는 정도만 남기고 이별했다. 

실은 그 옛날 것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다. 

추억을 들춰보는 것보다 코앞에 할 일이 많다. 아직 덜 늙어서 다행이다. 푹 늙으면 그것들을 반추하려고 못 버릴 것 같기도 하다. 

돌아보니 명품이나 귀물이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지없이 가볍다. 버리고 버리니 주변이 훤하고 상쾌하다.


통쾌?

미투me too운동이 검찰을 시작으로 문학, 연극, 방송, 음악계 대학로까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건강하고 깨끗한 내일을 위해 건너야 할 다리다. 썩은 곳은 잘라내고 늘어진 곳은 조여야 한다. 난감하고 괴롭지만 겪어야 할 진통이다.

여자와 남자가 동등한 권리를 갖게 된 지 백년이 채 안 되었다. 여자는 모성을 기반으로 스스로 낮추고 품는 일에 익숙했다. 

우리는 성에 분방한 남자를 영웅호색으로 인정하던 시대를 살아왔다. 남자들의 욕망 표현에 관대해서 이런 일이 만연했다. 

어쩌면 공공연하게 묵과해 온 일들이 연일 뉴스로 오른다. 다시금 통탄하고 혹은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여자의 성을 권력을 앞세워 강제 추행한 행위를 천하에 드러내고 있다. 지금까지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의 심각성을 무시하고 은폐했다. 

오히려 ‘행실을 어떻게 했기에…, 그 자리에서 강력하게 항의하지 않았느냐’는 역공격까지 했다.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가부장제의 문제나 유교사상의 폐해라고도 하지만 이는 도덕성 결여와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사람의 인격 문제다. 

유학이념으로 무장한 선비는 남들 앞에서는 물론,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삼가지 않았는가.

멀리 있는 파렴치한을 질타하는 건 단호할 수 있지만, 가까이 있는 어리석은 남자에게 철퇴를 내리는 건 쉽지 않다. 

이 대책 없는 연민과 체면 때문에 덮어 온 시간이 너무 길었다.

상호 소통이 아닌 접촉은 폭력이다. 수평관계가 아닌 수직관계, 강자가 약자에게 가한 부적절한 행위라면 여자라고 자유로울 수는 없다. 

숫자가 적어서 드러나지 않았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내 방식의 호의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거세게 번지는 미투 소용돌이가 그동안의 그릇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핑계보다 참회가, 연민 보다 분노가 세상을 정화할 것이다. 

고통 받은 피해자를 생각하면 통쾌한 일이다. 그런데 이 착잡한 기분은 뭔가.


          <수필세계> 2018,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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