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잃고 / 김수영 너를 잃고 / 김수영 뉘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만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있는 너는 억만재의 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단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있기 위하여 나는 .. 시 - 필사 2006.07.20
딸아! 연애를 해라! / 문정희 딸아! 연애를 해라! / 문정희 호랑이 눈썹을 빼고도 남을 그 아름다운 나이에 무엇보다도 연애를 해라. 네가 밤늦도록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두드리거나 음악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몹시 흐뭇하면서도 한편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단다. 그동안 너에게 수없이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마는, 또.. 시 - 필사 2006.07.19
삶은 감자 / 안도현 삶은 감자 / 안도현 삶은 감자가 양푼에 하나 가득 담겨 있다 머리 깨끗이 깎고 입대하는 신병들 같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중이다 감자는 속속들이 익으려고 결심했다 으깨질 때 파열음을 내지 않으려고 찜통 속으로 눈을 질끈 감고 익었다 젓가락이 찌르면 입부터 똥구멍까지 내주고, 김치가 머리.. 시 - 필사 2006.07.19
봄밤 / 김사인 봄밤 / 김사인 나 죽으면 부조돈 오마넌은 내야 도ㅑ 형, 요새 삼마넌짜 리도 많던데 그래두 나한테는 형은 오마넌은 내야도ㅑ 알 었지 하고 노가다 이마무개(47세)가 수화기 너머에서 홍시 냄새로 출렁거리는 봄밤이다. 어이, 이거 풀빵이여 풀빵 따끈할 때 먹어야 되는디, 시인 박아무개(47세)가 화통 .. 시 - 필사 2006.07.18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 황동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 황동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자전거 유모차 리어카의 바퀴 마차의 바퀴 굴러가는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가쁜 언덕길을 오를 때 자동차 바퀴도 굴리고 싶어진다 길 속에 모든 것이 안 보이고 보인다, 망가뜨리고 싶은 어린 날도 안 보이고 보이고, .. 시 - 필사 2006.07.15
그 옛날의 사랑 / 오탁번 그 옛날의 사랑 / 오탁번 지붕 위에 널린 빨간 고추의 매운 뺨에 가을 햇살 실고추처럼 간지럽고 애벌레로 길고 긴 세월을 땅 속에 살다가 우화 (羽化) 되어 하늘을 나는 쓰르라미의 짧은 생애를 끝내는 울음이 두레박에 넘치는 우물물만큼 맑을 때 그 옛날의 사랑이여 우리들이 소곤댔던 정다운 이야.. 시 - 필사 2006.07.15
기항지 1 / 황동규 기항지 1 / 황동규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중의 어두운 용골들이 .. 시 - 필사 2006.07.12
즐거운 편지 / 황동규 즐거운 편지 /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 로움 속으로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 시 - 필사 2006.07.12
풍장27 / 황동규 풍장27 / 황동규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시 - 필사 2006.07.12
참을 수 없을 만큼 / 황동규 참을 수 없을 만큼 / 황동규 사진은 계속 웃고 있더구나 이 드러낸 채. 그 동안 지탱해준 내장 더 애먹이지 않고 예순몇 해 같이 살아준 몸 진 더 빼지 않고 슬쩍 내뺐구나! 이 한 곳으로 생각을 몰며 아들 또래들이 정신없이 고스톱 치며 살아남아 있는 방을 건너 빈소를 나왔다. 이팝나무가 문등(門燈).. 시 - 필사 2006.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