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퇴적층/ 신용목 말의 퇴적층 - 신용목 내가 뱉은 말이 바닥에 흥건했다 누구의 귓속으로도 빨려들지 못했다 무언가 지나가면 반죽처럼 갈라져 사방벽에 파문을 새겼다 누구도 내 말을 몸속에 담아가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문을 닫고 사라졌으며 아무도 다시 듣지 않았다 결국 나는 빈 방에서 혼잣말을 시작했다 뱉은 .. 시 - 필사 2008.06.10
부쳐먹다 / 김선우 부쳐 먹다 -김선우 강원도 산간에 산비탈이 많지요 비탈에 몸 붙인 어미 아비 많지요 땅에 바싹 몸 붙여야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목숨이라는 듯 겨우 먹고살만 한 '겨우' 속에 사람의 하늘이랄지 뜨먹하게 오는 무슨 꼭두서니 빛 광야 같은 거랑도 정분날 일 있다는 듯 그럭저럭 조그만 땅 부쳐 먹고 산.. 시 - 필사 2008.06.10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 날 / 문태준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 날 - 문태준 못자리 무논에 산 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 한 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 게눈처럼, 봄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오후 자목련을 넋 놓고 바라본다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 아니었을지도 저 수많은 작고 여린 순들이 봄나무에게 중심이.. 시 - 필사 2008.02.25
마음을 살해한다 / 백무산 마음을 살해하다 - 백무산 무거운 것이 바윗덩어리가 아니라 마음인 줄 몰랐다 요지부동인 것이 쇠말뚝이 아니라 마음인 줄 몰랐다 쇳덩이가 변하고 바위가 바귀어도 형체도 없는 마음이 쇠말뚝보다 더 움직일 줄 모른다 마음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인 줄 알았더니 녹슨 청동거울보다 못하다 마음이 .. 시 - 필사 2008.02.03
여승 [女僧] / 백 석 여 승 - 백 석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낮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고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 시 - 필사 2007.10.19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 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 노을을 품으려거든 여인의 둔부를 스.. 시 - 필사 2007.10.19
흰 부추꽃으로 /박남준 흰 부추꽃으로 - 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 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 시 - 필사 2007.10.16
내 운명을 바꾼 그 부드러움 / 파블로 네루다 내 운명을 바꾼 그 부드러움 - 파블로 네루다 내가 죽을 때, 당신의 손이 내 눈을 덮기 바란다 나는 당신 사랑스런 손의 빛과 말을 원하며 그것들의 신선함이 한 번 더 내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나는 내 운명을 바꾼 그 부드러움을 느끼기를 바란다 나는 내가 잠들어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당신이 살기를.. 시 - 필사 2007.10.09
그리움 / 이용악 그리움 - 이용악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이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 시 - 필사 2007.10.09
둥근 발작 / 조말선 둥근 발작 - 조말선 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 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 하십시오 흰 사과 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기성향이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 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 시 - 필사 2007.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