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부석사 / 정호승 그리운 부석사 -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 시 - 필사 2009.04.17
배나무의 치매 / 박라연 배나무의 치매 - 박라연 어제까지는 양조장집 마나님이시다가 오늘부터는 밥벌이에 나서느라 종일 지체가 구겨져도 부도난 가계(家系)의 팔다리와 이 방 저 방 문창호지 속까지 배꽃을 피워내 식구들의 남루한 잠을 달게 달여주시던 내 어머니 너무 오래 꽃 피우다 눈엣가시가 된 듯, 허허롭다 보호 .. 시 - 필사 2009.04.17
가을 저녁 / 이면우 가을 저녁 - 이면우 퇴근길 버스정류장 가는 길 뒹구는 후박나무 잎새에 가만히 발 겹쳐보네 구두보다 길고 내 쪽배처럼 생긴 누런 잎 한 발로 딛고 남몰래 휘청거리네 그렇지, 물 위에 닫는 첫발은 늘 마음 먼저 출렁이지 그때 이맘때 이른 저녁 멀고 빈방에 불 켜두고 만삭인 아내 쪽배에 태워 노을 .. 시 - 필사 2009.04.11
喪家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喪家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 가에 .. 시 - 필사 2009.04.11
목련 / 안도현 목련 - 안도현 징하다, 목련 만개한 것 바라보는 일 이 세상에 와서 여자들과 나눈 사랑이라는 것 중에 두근거리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었으니 두 눈이 퉁퉁 부은 애인은 울지 말아라 절반쯤만, 우리 가진 것 절반쯤만 열어놓고 우리는 여기 머무를 일이다 흐득흐득 세월은 가는 것이니 시 - 필사 2009.04.11
지평선 / 김혜순 지평선 김혜순 누가 쪼개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내가 눈을 뜨자 닥아오는 .. 시 - 필사 2008.07.29
삽 / 정진규 삽 - 정진규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 토록 입술에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 주 잘 드른 소리, 그러면서도 한두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 (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 시 - 필사 2008.07.27
수선화, 그 환한 자리 / 고재종 수선화, 그 환한 자리 - 고재종 저기 뜨락 전체가 문득 네 서늘한 긴장 위에 놓인다 맵찬 바람이 하르르 멎고 거기 시간이 잠깐 정지한다 저토록 파리한 줄기 사이로 저토록 샛노란 꽃을 밀어올리다니 네 오롯한 호흡 앞에서 이젠 나도 모르게 환해진다 거기 문득 네가 있음으로 세상 하나가 엄정해지.. 시 - 필사 2008.07.24
허물 / 이어령 허 물 - 이어령 몰래 보면 볼 수가 있다. 이른 아침에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슬내린 어두운 숲으로 가면 매미가 허물을 벗고 매미가 되는 것을 뱀이 허물을 벗고 뱀이 되는 것을 나무들이 허물을 벗고 나목이 되고 바위가 허물을 벗고 구름이 되고 강물이 허물을 벗고 비가 되는 것을 몰래 보면 볼 수.. 시 - 필사 2008.06.29
박영근 이후 / 안상학 박영근 이후 - 안상학 누구라도 이젠 밤늦게 전화해도 반갑게 받자고 차비 만 원 달래면 웃전까지 얹어 주자고 천 리고 만 리고 택시타고 달려오면 택시비에 술값까지 마련해서 버선발로 마중가자고 마음먹기도 전에 박찬 시인이 갔다. 그래, 이젠 정말 어느 누구라도 살아 있을 때 잘해 주자고 술 한 .. 시 - 필사 2008.0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