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은 북상중 / 이문숙 태풍은 북상중 이문숙 물류창고 지붕 위 타이어를 보네 육중하게 방수막을 누르고 있네 창고 속으로 박스에 담긴 여러켤레의 신발들이 딸려들어가네 태풍은 북상중이라는데 길이 유실되고 방파제가 붕괴되고 수백년 마을이 폐허가 되는 막대한 위력의 태풍이 오고 있다는데 이곳에는 타이어 아래 방.. 시 - 필사 2011.08.16
천리향을 엿보다 / 조용미 천리향을 엿보다 조용미 이월에 집으로 가져온 서향이 열흘 지나 꽃을 피웠다 단단하던 꽃망울이 천리 밖에서 내가 들은 격렬한 슬픔의 노랫소리를 함께 들은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한꺼번에 꽃을 피워올리겠는가 내 목메임이 멀리 네게로 전해졌구나 바깥은 홍자색 안쪽은 흰색의 .. 시 - 필사 2011.08.07
비밀의 화원 / 김소연 비밀의 화원 김소연 겨울의 혹독함을 잊는 것은 꽃들의 특기, 두말없이 피었다가 진다 꽃들을 향해 지난 침묵을 탓하는 이는 없다 못난 사람들이 못난 걱정 앞세우는 못난 계절의 모난 시간 추레한 맨발을 풀밭 위에 꺼내놓았을 때 추레한 신발은 꽃병이 되었다 자기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꽃들의 특.. 시 - 필사 2011.08.07
그 머나먼 /진은영 그 머나먼 진은영 홍대 앞보다 마레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시 - 필사 2011.08.07
聖 고독 / 천양희 聖 고독 천양희 고독이 날마다 나를 찾아온다 내가 그토록 고독을 사랑하사 고苦와 독毒을 밥처럼 먹고 옷처럼 입었더니 어느덧 독고인이 되었다 고독에 몸 바쳐 예순여섯 번 허물이 된 내게 허전한 허공에다 낮술 마시게 하고 길게 자기 고백하는 뱃고동 소리 들려주네 때때로 나는 고동 소리를 고통.. 시 - 필사 2011.08.07
대책 없는 봄 / 임영조 대책 없는 봄 임영조 무엇이나 오래 들면 무겁겠지요 앞뜰의 목련이 애써 켜든 연등을 간밤에 죄다 땅바닥에 던졌더군요 고작 사나흘 들고도 지루했던지 파업하듯 일제히 손을 털었더군요 막상 손 털고 나니 심심했던지 가늘고 긴 팔을 높이 뻗어서 저런! 하느님의 괴춤을 냅다 잡아챕니다 파랗게 질.. 시 - 필사 2011.03.28
비행장을 떠나며 / 허수경 비행장을 떠나면서 허수경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는 무표정했어 비행장을 떠나면서 우리들은 커피를 마시며 우울한 신문들을 읽었고 참한 소설 속을 걸어다니며 수음을 했지 사랑이 떠나갔다는 걸 알았을 때 우리들의 가슴에서는 사막이 튀어나왔는데 사막에 저리도 붉은 꽃이 핀다는 건 아무도 몰.. 시 - 필사 2010.09.10
몸관악기 / 공광규 몸관악기 공광규 "당신, 창의력이 너무 늙었어!" 사장의 반말을 뒤로하고 뒷굽이 닳은 구두가 퇴근한다 살이 부러진 우산에서 쏟아지는 빗물이 슬픔의 나이를 참으라고 참아야 한다고 처진 어깨를 적시며 다독거린다 낡은 넥타이를 움켜쥔 비바람이 술집에서 술집으로 굴욕을 끌고 다니는 빗물이 들.. 시 - 필사 2010.08.30
거짓말 / 공광규 거짓말 공광규 대나무는 세월이 갈수록 속을 더 크게 비워가고 오래된 느티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몸을 썩히며 텅텅 비워간다 혼자 남은 시골 흙집도 텅 비어 있다가 머지않아 쓰러질 것이다. 도심에 사는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머리에 글자를 구겨 박으려고 애쓴다 살림집 평수를 늘리려고 안간.. 시 - 필사 2010.08.30
입추 입추 / 고정희 회임할 수 없는 것들이여 이 세상의 고통에 닿지 못하리니 열매 맺지 못하는 사과나무여 사랑의 도끼에 찍혀 불구덩이에 던져지리니 조상들의 예지를 절기를 보며 느낀다. 입추가 지나고 말복이 지나니 아침 저녁 바람의 맛이 다르다. 매미 소리의 기세도 조금은 꺾인 듯 하다. 가을, 열매를 준비하라고 채근한다. 도끼에 찍혀서 불구덩이에 들어가지 않으려면. 아, 이쁜 저 여인, 나도 공원에 책 들고 나가서 엎드려 봐야겠네. 넘이사 괴롭거나 말거나. 시 - 필사 2010.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