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묵주알 / 나가이 다카시

칠부능선 2011. 2. 28. 22:13

묵주알

- 나가이 다카시 (永井隆, 1908 ~ 1951)

 

  내가 결혼을 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삼년째 되는 해였다. 나는 당시 조수로서 월급이 사십 원이었다. 만주 사변 당시로 물가는 싼 편이었지만 사십원으로 살림을 꾸려나가기는 어려웠을 것 이다. 그러나 나는 아내로부터 불평을 들은 적이 없다. 새 옷 한 벌 사 주지도 않았다. 둘이서 요리 집으로 외식을 하러 간 일도 없다. 나는 매일 밤 늦게까지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고 아내는 살림에 전념하고 있었다.

  월 사십원의 생활을 칠 년간 계속했다. 가족의 옷은 전부 아내의 수제품으로 양말에서부터 와이셔츠에 이르기까지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만든 것이었다. 프랑스제 입술연지도 이탈리제 향수도 손쉽게 살 수 있는 시절이었지만 아내는 화장도 하지 않았다. 거름통을 메고 밭일을 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바느질이랑 뜨게질로 일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마을부녀회로 바쁜 틈틈이 아내로서 반미치광이의 시중을 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일을 착수하면 나란 인간은 연구 테마에 온통 정신을 빼앗겨 버린다. 며칠씩 도서관에 틀어박혀 연구에 몰두하다보면 연구 이외의 것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 이다. 내가 대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스쳐 지나가는데도 모르고 지나친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럴 때 나는 허공을 쏘아보며 무언가 중얼중얼하기 때문에 어쩐지 무섭다고 한다. 꼭 의논해야 할일이 생겨도 남편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수도 없어 아내는 내 대신 그 일을 다 해낸 것이다.

  이런 아내의 노고에 보답하는 것은 잡지에 실린 내 논문을 보여주는 것이 전부였다. 남들 같으면 소파에 편안히 기대거나 방바닥에 누워서 대충대충 읽는 시늉이나 하는 잡지를 아내는 단정하게 고쳐 앉아  정중히 받아들고 난 다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었다. 잉크 냄새나는 활자가 내 이름을 찍어 놓은 페이지에는 전문 용어로 가득차 아내가 읽는다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들이 수두룩했다. 그 속에는 남편의 생명이 마치 가다랭이 포처럼 깎여져 들어차 있는 것을 아는 아내는 눈시울을 적시면서 읽어가는 것이었다. 그 옆에서 나는 아내 대신 어린 것을 어르면서 잠시 가슴 속에 온천물이 솟아나는 것 같은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우리 집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일요일 아침 성당에 미사 참례하러 가는 때였다. 나는 큰 아이의 손을 잡고 아내는 작은 아이를 업고 밭둑길을 걸어 언덕 위 빨간 벽돌로 지은 성당에 간다. 종각에서도 우리를 부르는 종소리가 맑고 부드럽게 울러 퍼진다. 나와 아내와 어린 것의 목소리와 늙은 농부의 탁한 목소리도 하나가 되어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를 찬미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조교수가 되어 월급이 백원으로 오르자 아내는 겨우 마음을 놓는 거 같았다. 머지않아 아이가 소학교에 다니게 되므로 사십원으로는 난감한 처지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이 흘렀다. 나는 연구실에서 오랫동안 몰두하고 있던 방사선의 장해를 받아 백혈병에 걸리고 말았다. 남은 목숨이 앞으로 몇 년 되지 않는다는 진단을 받은 날 나는 아내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선후책을 생각하자고 했다.                       

  내가  예상하고 있던대로 아내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듣고 있었다. 그런 아내가 믿음직스러웠다. 이런 운명을 아내도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라면 내가 죽은 뒤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 나처럼 방사선 연구에 종사하는 학자로 만들어 주겠지. 생각하며 나는 마지막 마무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아내는 더욱 깊은 애정을 가지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병세가 차츰 진행하여 공습경보가 내려 무거운 철모를 쓰면 다리가 비틀 거릴 정도였다. 한번은 아내에게 업혀서 출근한 일도 있었다.

  8월8일 아침 아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생글생글 웃으면서 출근하는 나를 배웅했다. 조금 가다가 나는 도시락을 잊은 것이 생각나 집에 되돌아 갔다. 그리고 뜻밖에도 현관에 엎드려 울고 있는 아내를 본 것이다. 그 것이 이별이었다. 그날 밤은 방공 당번이어서 연구실에서 묵었다. 다음날인 9일, 원자폭탄은 내 위에서 떨어졌다. 나는 상처를 입었다. 순간 아내의 얼굴이 떠 올랐다.

  환자들의 구호에 바빴던 다섯시간 뒤 나는 출혈로 밭에 쓰러졌다. 그 때 아내의 죽음을 직감했다...라고 하는 것은 아내가 끝내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대학까지 1킬로미터니까 기어서 와도 다섯 시간이면 올 수있다. 설령 중상을 입었더라도 목숨이 있는 한은 기어서라도 기어코 나의 안위를 물으러 와 주었을 아내였다.

  사흘 째, 학생들의 사상자 처리도 일단락 되었으므로 황혼 무렵 집에 돌아갔다. 온통 잿더미였지만 나는 금방 발견했다. 부엌이 있던 자리에 남아 있는 검은 덩어리들...  그것은 탈대로 타버리고 남은 골반과 요추였다. 곁에 십자가가 달린 로사리오의 사슬이 남아 있었다.

  불에 탄 양동이에 아내를 주워 담았다. 아직 따뜻했다. 나는 그걸 가슴에 안고 묘지로 갔다.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죽어버려 저녁 해가 비치는 잿더미 위에 같은 모양의 까만 뼈가 여기저기 점점이 보였다. 내 뼈를 머지않아 아내가 안고 갈 예정이었는데 ...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 가슴에 안긴 아내는 인산석회가 되어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미안해요. 미안해요"라고 말하고 있는 아내의 목소리로 들었다. 

 

 

(작가 소개)

일본의 작가이며 천주교 신자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적으로 감동을 불러일으킨 소설 《나가사키[長崎]의 종》의 저자이다. 1908년 주고쿠 지방 시마네현[島根縣] 이이시 마을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무사 집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치밀한 사고력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으나,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남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고, 혼자 독서를 하거나 조용한 담화를 즐겼다. 고교를 졸업하고 나가사키 의대에 진학하여 방사선학을 전공하였는데, 의대에 들어가서 시체를 해부하는 등 인체를 다루다 보니 고등학교 시절부터 빠졌던 유물론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의 생각을 바꾸어 점차 가톨릭 신앙에 가까워졌고, 우라카미로 거처를 옮기면서부터는 가톨릭의 전통이 이어지는 마을의 분위기에 힘입어 가톨릭을 직접 경험하게까지 되었다. 1933년 2월 간부 후보생으로 입대하여 군의관으로서 만주사변에 종군하였다. 이때 아내가 가톨릭 신앙을 전도하여, 이듬해 귀환하자 바로 바오로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귀환 후 대학병원에서 결핵성 질환을 근절하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냈는데, 그러던 중에 백혈병에 걸리게 되었다.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도 그는 병원에서 X-Ray 필름을 선별하고 있었다. 원폭 피해의 복판에서도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피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는 이미 죽어 있었고, 두 아이만 남아 있었다. 그후 그는 폐허가 된 집터에 여기당(如己堂)이라는 움막을 짓고 아이와 함께 생활하였다. 남을 자기처럼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이 여기당에서 그는 불편한 몸을 무릅쓰고 집필 활동에 전념하여 5년 반 남짓한 동안에 무려 14권의 책을 썼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스스로 ‘내 사랑하는 신부’라 불렀던 죽음을 맞았다. 《원자병 개론》, 《로사리오의 쇠사슬》, 《만리무영》, 《이 자식을 남겨 놓고》 등 인간애 넘치는 작품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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