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숙박계의 현대시사 / 박현수

칠부능선 2007. 3. 4. 22:59

 

                   숙박계의 현대시사

 

                                                                    박현수

 

 

  화양리에는 여관 아줌마만 모르는

 

  현대시사가 있었다

 

  여관에서, 아니 여인숙에서

 

  하룻밤 자는데도

 

  이름과 주소를 기록하여야 했던

 

  궁색한 실록의 시절

 

  뒤통수치던 출석부를 닮았던

 

  검은 표지의 명부에

 

  그 해 여름 몇 줄씩 사초를 필사했다

 

  시선을 둘 데 없어

 

  안절부절못하는 여자를 등지고

 

  신경림, 최승자를 적고

 

  욕실 속 샤워하는 그림자를 짐작하며

 

  정현종, 김승희를 갈기고

 

  내 어깨를 잡고 낄낄대는 여자의 교정을 받아

 

  황지우, 김혜순을 기입하기도 했는데

 

  막상 숙박계를 펼치면 시보다

 

  더 어려운 이름들에 커플은 늘 바뀌었지만

 

  시들만은 제 이름을

 

  버리지 못하고 계절처럼 굳어 가고 있었다

 

  이성복, 김남주를 쓰고 보니

 

  너무 심하다 싶어 고친 저녁도 있었다

 

  김지하를 쓰지 못한

 

  소심한 오후도 빠트려선 안 되리라

 

  이 느닷없는 호출에도

 

  그즈음 현대시사는 평온하기만 했고

 

  검은 책 앞에서 고민하던 사가도 잊혀 갔지만

 

  화양리에서 엮는 변두리 시사에는

 

  계몽과 실험이

 

  몸을 섞는 현대시사가 있었다

 

  늘 여자 반, 남자 반으로 이루어진

 

  금기도 없고 계통도

 

  묻지 않는 뜨거운 불륜도 거기 있었다

 

  거기, 화양리에는

 

  여관 아줌마만

 

  건성으로 읽던 현대시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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