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푸른 들판을 걷다 / 클레어 키건

칠부능선 2024. 12. 13. 14:27

북스테이를 한, 동네책방 <오늘과내일>에서

내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고르니까 대표가 추천한 책이다. 요즘 하는 독서모임의 자료라고 한다.

클레어 키건의 단편소설 일곱 편이 실렸다.

현대적인 배경인데도 아일랜드의 정서가 보인다. 지독한 가부장사회의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와 설화를 바탕한 현실 너머를 바라보는 몽환적 풍경이 그려진다.

여기서도 여자들이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부단히 일어서고, 머물지 않고 떠난다.

이 짧은 소설들도 거슬러 다시 첫장을 어슬렁거리게 된다. 많이 궁글려서 걸러낸 글이다.

비열한 산림관리인이 데려온 개, 리트리버에게서 지혜를 배워야 할 판이다.

<굴복>에 '강아지는 키운 방식 그대로 개가 된다'는 문장이 나온다.

그 관습을 극복하려는 의지, 아니 그걸 힘으로 작동시키는 의지가 펼쳐진다.

<작별선물>

* 당신도 맨 처음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갔다. 잠옷을 입고 층계참을 가로질러 가서 아버지의 팔을 베고 누웠다. 아버지는 당신과 장난을 치고, 칭찬하고, 머리가 좋다고, 제일 똑똑하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끔찍한 손이 옷 속으로 들어와 잠옷을 끌어 올렸고, 우유를 짜면서 튼튼해진 손가락이 당신을 찾았다. 미친 손은 신음이 나올 대까지 그 자신을 만졌고 그런 다음 그는 당신에게 옆에 놓인 천을 달라고, 이제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고 했다. (17쪽)

딸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아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아버지, 떠나는 딸을 끝까지 침대에 누워 희롱한다. 갓난 강아지 새끼를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엄마, 일찌기 엄마는 엄마의 역할을 포기했다.

딸은 아버지 몰래 암망아지를 팔아서 여비를 마련해 미국으로 떠난다.

<푸른 들판을 걷다>

* 그들은 늘 외딴곳에서 만났다. ..

계절이 지나 겨울이 다시 왔다. 그들은 북쪽 멀리 사이런트벨리까지 가서 뉴리 근처의 작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다. 저녁 식사를 할 때 그녀가 와인 잔 자루를 만지작리며 더 이상 견딜수 없다고 했다. 그가 사제직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이제 이런 식으로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57쪽)

 

그녀는 그 사제가 집전하는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식이 끝나고 사제는 푸른 들판을 걸어 중국인 집을 찾아간다. 몸을 낫게 한다는 중국인, 전신를 두드리는 중국인의 손길에 마음이 평온을 찾는다. 낯설고 소중한 느낌으로 곁에 있는 설화석고 그릇을 바라보며 그녀를 회상한다.

* 그녀를 속속들이 알아가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그녀는 자기 인식이란 말의 너머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어떻게 보면 대화의 목적은 스스로 이미 아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녀는 모든 대화에 보이지 않는 그릇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야기란 그 그릇에 괜찮은 말을 넣고 다른 말을 꺼내 가는 기술이었다.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나누면 더없이 따스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발견하고 되고, 결국 그릇은 다시 텅 빈다. 그녀는 인간 혼서서는 스스로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 너머에 진짜 앎이 있다고 믿었다. (61쪽)

 

<산림 관리인의 딸>

남자들이 결혼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이다가 결혼을 하고 나면 신경쓰지 않는다. '잡은 물고기에게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서로 고통이지만, 참담한 결과를 맞는 건 남자다. 막연히 의심하던 남자는 불안하다. 당당하게 진실을 마을사람 모두 모아놓고 공개하는 여자는 스스로 면죄부를 준 셈이다.

* 마사는 아직 행복이 기억날 만큼 젊다. 이 아이가 생긴 날이 떠오른다. 아침에는 2월의 험한 하늘에 구름이 걸려 있었고 날이 갤 기미는 없었다. 그녀는 착유장에 내리쬐던 아침 햇살, 헛간에 비를 뿌리던 바람, 디건의 손에 비하면 너무나 부드럽고 낯설게 느껴지던 외판원의 손을 기억한다. 그는 두르지 않았고, 밀짚에 누워서 그녀의 눈이 젖은 모래 색이라고 말했다. (96쪽)

* 저지(리트리버)는 자기가 말을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입만 열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말을 한다. 자기의 말에 자기가 슬퍼한다. 왜 말을 멈추고 서로 안아주지 않을까? 여자가 울고 있다. 저지가 그녀를 핥는다. 손가락에 기름과 버터가 묻어 있다. 그 아래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냄새는 남편의 냄새와 다르지 않다. 저지가 손을 깨끗하게 핥자 마샤는 개를 쫒아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그 마음은 어제의 것이다. 이제 그것 역시 그녀가 절대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일이 되었다. (104쪽)

<퀴큰 나무 숲의 밤>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가 사제가 되었다. 사제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죽고... 사제가 죽고 사제가 살던 집에 살며, 옆집에 염소와 사는 남자의 아이를 낳아서 떠난다. 안주하지 않는 여자의 신비스런 힘과 상처가 선연하다.

* 그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축축한 풀밭에 누웠고, 그가 그녀에게 자기 씨를 심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그 대가를 치르리란 사실을 알았다. 다 끝난 다음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들 사이를 서성거리며 담배를 피웠다. 그런 다음 그는 등을 돌리고 말 한마디 없이 가버렸다.

마거릿은 밤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그녀는 나무 꼭대기를, 가지 너머를, 노란 달 조각을 바라보며 집으로 걸어갔다. 그 경험은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 그 가능성에 훨씬 못 미쳤다. (2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