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절하고 싶은 시인이다.
사실 가까이 살면서도 나는 그를 배려하느라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너른고을을 지날때는 그의 너른 품을 떠올렸다.
글이 곧 그 사람이라는 것에 이의가 없다. 그의 글로 인해 나는 나 홀로 애타기도 하며 나 홀로 가깝게 느끼고 있다.
허정분 시인이 살아낸 시간에서 나는 묵삭은 된장내가 또 다시 속을 훑지만, 마음이 푸근해지며 너그러움에 귀를 연다.
깊이 감사하며 절한다.
'일중독자' 란 자타 인정하는 호칭에 중독되어 이제는 일을 안 하면 온몸이 아프다. 또 일을 해도 아프다. 한생을 평화가 아니라 긴장이라는 끈으로 묶고 살아왔다는 흔적이다.
그런 와중에 시를 쓰는 일은 귀한 호사였고 내 마음의 행락이었다. 앞뒤가 오래된 이웃이고 산하가 오십 년지기 벗이다. 그 정겨운 벗들이 인간이 파괴하는 문명의 발달로 자꾸 변하고 있다. 안타깝다. 소소한 것에 아파하고 연연하는 마음조차 수습하지 못할 때가 많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내 귀에 이명이 오셨다
허정분
뉘신지 모르는데 양쪽 귀에 누군가 오셨다
해독이 안 되는 작은 소리가
귀청을 맴도는 뚱딴지
두어 군데 병원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불청객이 진을 친 귀가 갑갑하지만
이순耳順을 넘긴 나이
좋은 말만 들으라는 남의 흉보지 말라는
내 몸의 계시라고 생각하니 무심해진다
기왕에 오셨으니 한 시절
잘 놀다 가시라고 내버려 두리라
통할지도 몰라 꼬박꼬박 올리는 알약들 드시고
떠날 때가 되면 소리 없이 가시겠지
불통도 먹통도 때로는 부처님 말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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