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아침의 피아노>

칠부능선 2019. 8. 12. 19:46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일기

 

  '김진영 선생님은 임종 3일 전 섬망이 오기 직전까지 병상에 앉아 메모장에 <아침의 피아노>의 글을 쓰셨다.'

  로 시작한다.

  그리고 '2017년, 7월(1), 8월 ~~~ 2018년 1월 ~ 8월 (234)' 차례를 넘기는 것으로 내 마음은 쿵, 내려앉았다.

 

  맑은 영혼의 아름다운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는 모습은 경건하고 애틋하다.

  퀴블러 로스의 죽음의 5단계를 떠올렸다.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과정이 이곳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고도의 지성과 각정으로 무장한

  철학자답게 그의 첫 과정 부정과 분노는 조용히 녹아있다. 무던한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다.

  도도하고 까칠함이 매력이었던 그는 바로 착해졌다.

 

 

 

73.

투병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손님은 잘 대접해서 보내야 한다고 옛사람들은 가르쳤다.

사랑이 그렇듯 병과도 잘 이별하는 일이 중요하다. 잘 헤어지고 잘 떠나보내는 일이 중요하다.

미워하지는 않지만 함께 살 수는 없는 것이 있다. 그것들과의 불가능한 사랑이 필요하다.

 

117.

... 어제를 돌아보면 후회가 있고 내일을 바라보면 불확실하다. 그 사이에 지금 여기의 시간이 있다.

몹시 아픈 곳도 없고 깊이 맺힌 근심도 없다. 짧지만 온전히 나에게 주어진 시간 - 이 사이의 시간들은 내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는 일 없이 또한 존재할 것이다. 끝없이 도래하고 머물고 지나가고 또 다가올 것이다.

이것이 생의 진실이고 아름다움이다.

 

133.

바르트의<애도 일기>를 뒤적인다. 그는 사랑을 잃었다. 나는 건강을 잃었다. 그래서 다 같이 낙담에 빠져 있다.

그런데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는 완전히 잃었다. (어머니는 죽었다). 나는 아직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병이 걸렸지만

아직은 여러 면에서 건강하다). 바르트에 비하면 나는 사실 아주 소량을(물론 아주 중요한 것을) 읽었을 뿐이다.

그에게서 동병상련을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자기 연민은 치졸하고 가엾다.

 

220.

아침, 다시 다가온 하루, 또 힘든 일들도 많으리라.

그러나 다시 도래한 하루는 얼마나 숭고한가. 오늘 하루를 정중하게 환대하기.

 

234. (마지막 장)

내 마음은 편안하다.

 

 

 

2017년 7월 암 선고를 받았다. 그동안 이어지던 모든 일상의 삶들이 셔터를 내린 것처럼 중단되었다.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고 환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꼭 13개월이 지났다. 이 글은 그사이 내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지나간 작은 사건들의 기록이다. 환자의 삶과 그 삶의 독자성과 권위, 비로소 만나고 발견하게 된 사랑과 감사에 대한 기억과 성찰, 세상과 타자들에 대해서 눈 떠진 사유들, 혹은 그냥 무연히 눈앞으로 마음 곁으로 오고 가고 또 다가와서 떠나는 무의미한 순간들이 그 기록의 내용들이다. 폴 발레리와 롤랑 바르트가 쓰고 싶어 했던 모종의 책처럼 이 기록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써진 사적인 글들이다. ....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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