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철없는 문명 / 이어령

칠부능선 2010. 1. 8. 14:53
 

철없는 문명

(철)

- 이어령


  “빛을 보기 위해서는 눈이 필요하고 소리를 들으려면 귀가 있어야 돼. 그런데 시간을 느끼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나? 그래, 그건 마음이야. 마음이란 것이 없어 시간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 그 시간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이것은 미카엘 엔데의 동화《모모》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단 한마디로 줄여놓은 것이 우리말의 ‘철’이라는 말이다. 내가 많은 외국 말을 잘 알지 못해서 그런지, 아직 나는 이 세상에 ‘철’이란 말처럼 아름답고 사색적인 말을 발견하지 못했다.

  ‘철’을 영어로 번역하면 계절season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말의 ‘철’은 단순히 봄철, 여름철의 그 계절만 뜻하는 말이 아니다. 누구나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칭찬이나 꾸중을 듣게 되면 ‘철’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이제 철이 들었구나.” 착한 일을 하면 어른들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말썽을 피우거나 못된 짓을 하면 이번에는 “이 녀석, 아직 철이 덜 들었구나”라고 말하면서 머리에 꿀밤 하나를 먹이신다.

  철은 어디에 있는가. 철은 꽃피는 동산이나 흐르는 냇물 그리고 눈 내린 골짜기 안에도 있다. 얼음이 풀리면 한 철이 지나가고 꽃이 피면 서서히 한 철이 들어온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철이 가고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머릿속에 모세혈관과도 같은 핏줄 속으로 철이 가고 철이 들어오곤 한다.

  속에서 과일들이 익듯이 사람의 마음도 생각도 무르익는다. 말하자면 철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철이 와도 마음이 그것을 받아들일 줄 모르면 철이 들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영원히 철이 들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많은 법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나이를 먹는다고 하지 않는가. 시간은 우리 밖에서 흐르다가 그냥 사라져버리는 강물이 아닌 것이다. 마치 향기로운 과일을 먹듯이 우리는 시간을, 나이를 먹는 것이다. 그러면 시간은 나의 살과 피 속으로 들어가 마음이 되기도 하고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영원한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이 시간을 느끼는 마음이 없으면 어른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 나이 헛먹었구나.”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두 개의 몸무게를 갖고 살아간다. 저울로 달 수 있는 무게와 마음으로 다는 시간의 무게이다. 그래서 마음이 풍부하고 인격이 있는 사람을 보고 무게가 있는 사람이고 말하기도 한다.

  이제는 한국말 가운데서도 ‘철’이란 말은 점점 죽은 말이 되어가고 있다. 오래불망, 선진 대열에 끼기 위해 뛰어온 우리도 이제는 이른바 No3(no style, no sex, no season)의 현대 문명의 양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일정한 틀style도 없고, 남녀의 성차sex도 없어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철season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현대 문명인의 생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국식 생활이라는 것이다. 특히 ‘no season’의 그 철없는 생활이 바로 미국인들이 만들어낸 환경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부아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미국을 만든 것은 시간과 장소의 차별을 없애고 그것을 모두 균일화한 데 있다. 말하자면 이곳과 저곳을, 현재와 과거의 차이를 없애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미국의 독자성은 바로 독자성을 없애버리는 그 능력이 되어버렸다. 다른 나라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개인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환경이 민주주의라는,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평등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국을 통해서 시간과 장소의 평등화라는, 지금 보지 못한 세상을 목격하게 된다. 한때는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 그리고 계절에 따라서 음식의 독특한 맛이나 색채가 생활의 맛을 돋우어주었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의 차이를 없애버린 미국적 민주주의는 장소나 물건을 인간 밑에 예속시킴으로써 그것들을 모두 엇비슷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역사의 시간 차와 지역 차라는 두 개의 차이성마저도 하나의 제도로 흡수해 버렸다. 그런 힘이 바로 미국 문명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아주 어렵게 설명하고 있지만 우리말로 고치면 쉽게 이해랄 수가 있을 것이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그 문명의 본질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철없는 문명’이고 시도 때도 없이 냉장고에서 꺼내 먹는 과실들은 ‘철이 안 든 과실’이고,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철 모르는 사람들’ 이다. 미국식 환경 민주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철이 못 들거나 안 드는 사람들이고 할 수가 있다. 미국식 생활 방식이 전 세계로 번져가면서 전 인류가 철없이 살고 있다.

  그것은 시간을 보고 느끼는 마음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귀머거리처럼 계절이 가고 새 계절이 와도 우리는 그 빛의 변화도 보지 못하고 그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눈이 멀듯이 마음이 멀었다는 뜻이다. 이제는 ‘철’이라는 우리 토박이말부터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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