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 필사 +

쉰 즈음에 / 장영희

칠부능선 2010. 1. 3. 00:16

 쉰 즈음에

-장영희


  연구실에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데 갑자기 어깨가 결리고 손가락 관절이 쑤신다. 아픔을 호소하니 옆에 있던 조교가

  “선생님, 오십견이신가 봐요. 오십 넘으면 어깨가 아파진다는데…. 선생님 이제 오십 넘으셔서…. 하고 살짝 미소 띠면서 말한다. 맞아, 오십견이 올 때가 되었다. 50이라…. 가끔 내가 쉰이 넘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란다. 하루하루 꽁지 빠진 닭처럼 살아가면서, 그동안 내가 언제 서른을 넘기고 40대를 지나 쉰이 되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스무살 초봄, 하늘이 유난히 파랗던 날 새로 맞춘 진달래색 코트를 입고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강대 교문에 들어선 이후 내 삶의 필름은 색채를 잃어버렸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빠른 흑백 화면으로만 이어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쉰 살이 되어 지구상에 다시 떨어진 것처럼, 아직도 나는 쉰이라는 나이에 놀라고 익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스무 살… 나는 스무 살 청춘들과 살아간다. 아, 말만 들어도 그 끝없는 가능성과 희망, 아름다움으로 슬며시 입가에 미소를 가져오는 나이, 손가락 관절 하나하나까지 나긋나긋하고 발에 스프링을 매단 듯 통통 가볍게 걷고 어떻게 저 비좁은 공간에 인간의 내장이 다 들어갔을까 의심될 정도로 가느다란 허리, 맑고 총기 있는 눈빛, 온몸으로 싱싱한 젊음을 발산하는 스무 살 학생들 사이에 쉰 살 내가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스무 살 때 쉰 살 난 사람들을 보면서 스무 살이 나이 먹어 절로 쉰 살이 되는 게 아니라 애당초 쉰 살로 태어나는 무슨 별종 인간들처럼 생각했다. 눈가의 잔주름과 입가의 팔자주름을 짙은 화장으로 필사적으로 감추고, 단순히 생물학적 연륜만으로 아무데서나 권위을 내세우고, 자신의 외로움을 숨기려고 일부러 크게 웃고 떠들고, 가난한 과거에 원수를 갚듯이 묵젖이 다 보이게 입을 쩍 벌리고 밥을 먹는, 조금은 우스꽝스럽고 조금은 슬픈 존재들….

  어떤 이들은 나이 들어 가는 일은 정말 슬픈 일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나이 들어가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고, 노년의 나이가 가장 편하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살아 보니 늙는다는 것은 기막히게 슬픈 일도, 그렇다고 호들갑 떨 만큼 아름다운 일도 아니다. 그냥 젊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충실히 살아갈 뿐, 무슨 색다른 감정이 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또 나이가 들면 기억력은 쇠퇴하지만 연륜으로 인해 삶을 살아가는 지혜는 풍부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실감이 안 난다.

  삶에 대한 노하우가 생기는 게 아니라 단지 삶에 익숙해질 뿐이다. 말도 안 되게 부노기한 일이나 악을 많이 보고 살다 보니 타성이 강해져서 그냥 삶의 횡포에 좀 덜 놀라며 살 뿐이다.

  하지만 딱 한가지, 나이 들어 가며 조금은 새롭게 느끼는 변화가 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즉 세상의 중심이 나 자신에서 조금씩 밖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도 눈이 가고, 갑자기 잊고 지내던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지고, 작고 보잘것 없는 것들이 더 안쓰럽게 느껴진다.

  단순히 나이 들어감에 따라 취향이 좀 주책 맞아져서 그런지, 아니면 이젠 내게 내가 너무 식상한 소재라 남에게 더 관심이 가는 건지, 또 아니면 나야 어차피 떠날 몸이니 내가 간 뒤에도 꿈쩍 않고 남을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 더 커져서 그런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살아 보니 사는 게 녹록지 않아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측은지심인지,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나뿐만이 아니라 남이 보인다. 한마디로, 그악스럽게 붙잡고 있던 것들을 조금씩 놓아 간다고 할까, 조금씩 마음이 순하고 착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결국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은 인간의 지식도, 열정도, 용기도 아니고 ‘착함’이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 자체에 대한 연민, 내 자리 남에게 조금 내주는 착함이 없다면, 그러면 세상은 싸움터가 되어 금방이라도 무너질지도 모른다. 난 쉰이 넘어서야 겨우 그걸 깨닫지만, 스무 살 우리 학생들은 나보다 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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