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초록설법 / 홍일선

칠부능선 2025. 1. 6. 14:03

저들은 어쩌자고... 저리 부끄러움을 모르는지.

120년 묵은 적폐들이 본색을 드러낸다.

친일 청산을 못해 주춧돌이 부실하다.

심란해서 일이 손에 안 잡힌다.

마음 다스리려고 며칠 전에 받은 홍일선 선생님 시집을 다시 잡았다.

낮고 지순한 음성 <초록설법>에 귀기울인다.

한 점 부끄러울 것 없는 농부시인의 지극한 말씀에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깊이 고개숙인다. 홍 시인님 강녕하소서.

절 하소서

아침에 들녘 향하다가

맨 먼저 눈 마주친 이가

도리 노인회장님이 아니옵구

띠풀 하찮은 초개였더라도

그에게 절하소서

바뻐 절 못하였다면

해질녘 돌아오다가 만난 이가

반딧불이 푸른 신령이 아니옵구

하필 검은 비니루들이었더라도

그에게 절하소서

밭의 신령들

캄캄한 밤

잠든 밭 깨실지 몰라

조용조용히 밭에 간다

귀한 손님 반딧불이 보러 가는 게 아니라

호미 찾으러 가는 게 아니라

미움 모시고 사는 야생화 일가들

그중 많이 미워한 방동사니에게

가을이 가기 전에

송구하다는 말 전하러 간다

밭둑에 두고 온 슬픔 찾으러 간다

신령님들 말씀 들으러

나 밭에 간다

벼락

먹구름 꽃 사이

쿠르릉 쿠르릉 번쩍…

희디흰 섬광 벼락 신령께서

야만의 마을을 심방 나오신 것입니다

세상은 순식간 무명으로 가득 차

아직 거짓을 모르는

보랏빛 도라지꽃만 오롯하셨는데

시를 써서 세상을 숱하게 기망한

나는 숨을 데를 찾는 것이지만

사방에서 끈달아 쿠르릉 번쩍!번쩍!

이놈 고얀 놈 벼락 맞아 죽을 놈

그래도 사무사思無邪냐고

아직도 사무사냐고

일갈 하시는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