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사람이랑

[스크랩] 노정숙의 아포리즘 `바람, 바람`

칠부능선 2013. 11. 13. 08:10

 

1.

이 책 속에서 '미안하다'라는 단문을 여러번 발견하였다. 문장은 감정의 표현이다.

'미안하다'라고 말할 줄 아는 심성을 나는 존경한다.

 

사람들이 떡을 치며, 널을 뛰고, 윷놀이하는 사진이 농장 벽에 전설처럼 걸려 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강제로 야간열차에 실려 동토의 변방에 버려졌던 이들. 시베리아의 삭풍을 달려 황무지에 떨어진 카레이스키들,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이다. 검은 머리채 굽은 등 끌려가는 행렬, 뒤따르는 수로는 말없이 잘도 흐른다. 버린 적 없는데 잃어버린 고향. 잊어버린 말, 말, 말.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타슈켄트, 그 농장)

 

제 손으로 벌여놓고도 미안하다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널린 세상이다. 꽃같은 소녀들을 전쟁터에 끌고가 유린하고도 잘못이 없다고 버티는, 그런 뻔뻔함으로 강대국의 수상이 되는 세상이다. 그보다 더한 뻔뻔함과 교활함이라야 권력을 쥐게 되는, 더러운 질서가 상식처럼 지배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현대인들은, (아무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늘상 상처를 받는다. 성처투성이다.

그럴 때, 그 여러 종류의 막된 폭력들을 대신하여 '미안하다'라고 말할 줄 아는 (그 스스로는 역사에 죄를 지은 적도 남을 짓밟은 적도 없을 것이 분명함에도) 작가의 심성은 고결하다. 이것이 모름지기 현대의 작가들에게 부여된 구실일 지도 모른다. 글이 독자들에게 同調를 일으키는 중요한 구실을 갖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같은 에세이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이 밖에도 여러 곳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읽었다. 심지어 한 파트(2부)의 제목은 '미안하다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알게 모르게 그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그에 대한 보답이나 보응이 있기를 기대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효도로 보답할 것을 기대하고,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그 사랑에 대해 여자가 순종으로 응답할 것을 바라지 않는가. 알고보면 우리네 사랑이란 실상 '거래'의 일부일 때가 많다. 그런데 이 사랑은 어째서 미안한 것일까.

와 닿은 느낌이 있지만, 서둘러 읽기를 미룬다. 궁금하다 해서 뚝딱 읽고 덮을 책이 아니다. 아포리즘이 아닌가. 천천히, 느리게 읽으며 음미하기 위해 남겨둔다. 다만 2부의 첫번째 글을 미리 들여다보다가, '종소리는 둥글다'라는 화두를 얻는다. (이것으로 새로운 詩 한 수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바람 바람

저자
노정숙 지음
출판사
은행나무 | 2013-09-2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바람은 찢긴 깃발을 흔들어 정지된 풍경을 깨운다......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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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에 살던 도도새는 1681년에 멸종했다. 생물학자들은 멸종 원인을 세 가지로 분석했다. 유순했다. 적이 없다. 날지 못했다. 천연기념물 같은 저 여자도 도처의 적을 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입만 열면 누군가를 칭찬하기 바쁘다. 내일 죽는다. (필연)

 

이리 짠한 글도 있다. 수많은 독자들에게 내재하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아픔들을 그의 아포리즘은 수없이 건드릴 지도 모른다(어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하여 의사는 메스를 들고 더 큰 상처를 만들기도 하지). 하지만 따뜻하다. 이렇게 '따뜻한 아픔'을 주는 작가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랴.  

 

나는 개인적으로 '아포리즘'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거기 해당하는 전형으로 헤르만 헤세의 글들과 '어린 왕자'(쌩 떽쥐베리) 같은 작품을 떠올린다. 머리에서 와닿는 깨우침이 있거나, 마음에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글속의 發電장치 같은 것? (에세이에 그런 장치가 없다면 일종의 신변잡기에 그치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보아 왔다.) 자극되는 부위가 독자의 '영혼'이라면 더 좋겠다. - 그런 무언가를 장착한 글이라면 일종의 전형을 완비한 것이리라. 그래서 박수를 보낸다. (이런 소개글을 쓰는 건 사실 내게 분에 넘치는 짓이다. 양해를 구하며..)

 

 

3.

저자 노정숙은 블로그에서 친분을 맺고 있는 칠부능선님의 실명이다. 벌써 여러권째의 저서지만, 이번 책은 지금까지와 좀 다르다고 했다. 이름하여 '아포리즘 에세이'다. 詩적인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고, 짧은 글마다 사색적인(철학적인) 주제를 담았다. 아포리즘이란 말에서, 그의 작품세계가 마침내 (山行으로 치자면) 7부능선을 넘어 본격적인 문학의 경지에 올라섰음을 직감했다.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글 쓰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도달하고 싶어하는 단계가 있다. 몇몇 지인들에게 이해되는 단계를 넘어, 글을 아는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단계를 넘어, 어느 누가 봐도 '좋다'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쓰는 단계. 어쩌면, 작가가 자신의 글을 불특정 다수의 대중 앞에 스스럼 없이 내놓을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시점부터일 것이며, 가격표 붙여 '市場'에 내놓기에 당당해지는 것도 이 시점부터일 것 같다(나는 아직도 대중 앞에 글을 내놓을 때 얼마간의 미안함이나 부끄러움이 있다). 저자의 예전 글들도 좋았지만, <바람, 바람>이라는 이 책과 책속의 글들은 충분히 완숙되었음을 느낀다.

7부능선을 넘어섰다. 정상 언저리다. 지금부터 順行의 시간이 길기를 축원드린다. 

 

그의 에세이는 완성 단계에 이르렀지만, 바야흐로 출발이다! ,, 라고 말하고 싶다.

 

출처 : 자유세상만들기
글쓴이 : coolwis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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