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저녁에 전화를 받았다.
16일 새벽에 중국문학기행을 떠나는데...
당선소감을 메일로 보내주라고 한다. 월욜까지지만 오늘 밤 안에 해결해야 한다.
얼떨떨...
당선소감이라니. 좌우튼. 몇 자 보냈다.
한곳에서 오래 놀다보니 이런 일도 있네.
꽉찬 일주일, 호남성인문학기행은 완전 빡센 노동이었다. 정신적으로.
관광지가 아닌 곳을 찾아 헤매느라 중국기사도 가이드도 많이 힘들었다. 불편하고 길게 타는 차에서는 계속 문학강의.
나는 너무 피곤한 상태로 가서 감기에 흠뻑 들었다. 약을 얻어먹으며 겨우 버텼다.
내일이 시상식이라니 급처방이 필요하다. 오후에 병원가서 링거까지 맞고서 겨우 정신을 수습했다.
전에 처럼 귀국과 동시에 일상복귀 할수 있었다면 오늘은 부산에 문상가야 했는데.
이게 늙은 것인가.
슬프다기보다 불편하다.
파김치가 되어서 온 나를 보며. 냄편이 이젠 여행 가지 말란다.
이건 충전이 아니라 탈진이라고.
<심사평>
노정숙 씨의 「외할머니의 왼손」 외 4편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체적 내질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시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작품이 필요로 하는 어법과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들어앉아 있었다. 균질적 형상화 능력과 함께, 작품들 사이의 작은 편차가 시인으로서의 능력을 미덥게 하였다. 당선작 가운데 한 편인 「외할머니의 왼손」에서는, 외할머니의 이야기 속에 담긴 내러티브를 씨줄로 삼고 외할머니의 왼손 이미지를 날줄로 삼아 삶의 슬프고도 고된 서사를 선명하게 담아내었다. 그럼으로써 삶에서 상처와 치유의 과정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이미지와 서사를 결속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삶의 깊은 진실을 탐침하는 데 전심을 다해주기를 바라볼 만하다고 생각하였다. 심사위원들의 논의 끝에 가작으로 뽑게 되었다.
심사위원 : 이경철(시인, 문학평론가, 동국대 겸임교수),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외할머니의 왼손
왼손으로 늘 바닥을 쓸고 앉는 외할머니
넓은 치마폭을 가지런히 모으면
그 한 자락을 손에 감고 난 드러누워
옛날이야길 듣는다.
우렁각시를 시작으로
귀신과 원님이 너나들이 하고
맨손으로 호랑일 잡았다는 왕손 아제 펄펄 날고
맘씨 고운 친구 순덕이가
정신대에 끌려간 대목에 이르면
저고리 고름으로 코를 푸는 척하며
눈물을 훔치는 외할머니의 왼손
시주승의 홀쭉한 바랑에 됫박 쌀 담을 때도
내 상고머릴 쓰다듬을 때에도
왼손만을 재게 놀린다.
동백기름 발라 쪽진머리 반드레 매만지고
사분사분 마실갈 때면
어머니는 명주솜 넣어 누빈 천으로
어깨에 붙은 몽당팔을 감싸고
텅 빈 오른팔을 저고리 앞섶에 여며드린다.
외할머니의 오른팔을
질겨빠진 피댓줄이 감아먹은 후부터
어머니 가슴엔 피멍이 들고
덜컹덜컹 왁자하던 외가의 정미소는
친친 거미줄을 쳤다.
해오라비난초
그를 보고 깜짝 놀랐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나비, 아니 학이던가
긴 다리가 흙살에 갇힌 하얀 나비
날아보지 못하고 죽은 그의 제삿날
음복한 술이 과했는지 이내 몽롱하네
환하게 웃는 사진 속 그 사람
설핏 작은 눈이 커지네
조곤조곤 귀엣말 이어지고
내 머리 쓰다듬던 그 손길
목덜미를 간질이던 입김이 스물스물 피어나네
나는
훌훌 벗고
춤을 춘다 땀으로 얼룩진 초혼제
너울너울 날개 펴고 바짝 세운 머리 꽃술
못내
발을 뗄 수 없어도 덩실덩실
춤이야말로 몸시가 아니던가
기신기신 어깨춤에 올라
달보드레한 입술에 잠시 머물다가
난향 가득한 귓가에 이르네
잘 사시오, 그 매정한 인사가
닿을 듯한 이명 같은 먼 울림
피와 피가 수런거리고
살과 뼈가 뒤엉켜 이룬 마지막 기상
허공에 그리는 동그라미 커질수록 다가오는 이
순간, 격랑에 휩싸여
둥둥 춤추며 날아오르는
저, 순백의 꽃잎
누운 자에게 말 걸기
천불산 운주사 와불 옆에
이른 서리 푸르게 떨어지는 낙엽들
물들이지 못한 말 너무 많아
낮은 바람에 실랑이네
앉은 불(佛) 선 불(佛)
세상을 벗은 그들
잘난 탑(塔) 못난 탑(塔) 모두 모여
빌고 또 빌, 그 무엇이 아직도 남아
자리 털지 못하고 서성이는가
그윽한 눈길 한번 못 맞추고
머슴바위 늘인 목 서늘한데
칠층탑 위에 앉은 조롱새
웃는 듯 우는 듯 날 새워도
무심히 뜬구름만 보는 염불
천 년 누운 자리 등창 나
이제 물릴 만도 한데
뼈 속조차 한기 든 저문 날
서성이는 바람 베고
그 곁에 허리 감고 누워나 볼까
패싸움
상추 치커리 고추가 눈 부라리며 막말을 한다.
근대 아욱도 분기탱천 발길질 요란하다.
풀숲에 갇힌 쑥갓 쪽파는 머리채를 잡혔다.
이파리 절반은 벌레한테 내주고 겨우 손가락만큼 영근 총각무 씩씩대며 허연 팔을 걷어부쳤다.
하얀 손차양 아래 고개 내민 당귀는 우아 떨며 샐쭉거리고,
죄 푸른 것들 사이에 붉은 얼굴 백일홍까지 삿대질하고 나섰다.
구석진 자리에 멀거니 서있는 돼지감자, 시앗에게 안방까지 내 준 큰엄니처럼 주춤주춤 물러선다.
나 이렇게 도리천 아수라 속에서 자랐다.
백구두
아침부터 구두를 닦는다.
솔질을 하고 퇴퇴 침을 뱉어가며 헝겊을 야물게 잡고 광을 낸다.
하얀 구두코가 반짝반짝 빛난다.
날선 바지에 중절모 눌러 쓴 아버지 찡긋 웃으며 내게 동전 한 닢 건내준다.
한량아버지 나서면 골목 끝으로 모든 빛이 따라 나간다.
이 골목에서 쓸개 빠진 놈은 네 놈 뿐이여 할머니 고함소리 자지러진다.
할머니만 이마에 옥양목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눕는다.
어머니 재바른 빗자루 소리가 나른한 마당에 다시 햇살을 쓸어 모은다.
며칠, 때론 몇 달 만에 돌아온 아버지 양복에 박하향 가득하다.
언제고 다시 떠날 백구두, 댓돌 위에서 멀뚱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