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153

제트스키와 백령도

제트스키와 백령도 노정숙 ​ 백령도에서 나오는 날은 바람이 제법 불었다. 전날 유람선 타는 일정이 취소된 걸 보면 제 시간에 떠날 수 있는 것도 다행이다. 2층 맨 앞자리에 앉아서 밀려오는 파도를 즐기는데 뒷자리에 앉은 사람이 요동칠 때마다 비명을 지른다. 앞으로 오라고 했다. 조심조심 앞자리로 나와 앉아 오는 파도를 바라보면서부터 조용해졌다. 멀미로 화장실을 드나드는 사람도 있다. 좀 전에 먹은 아이스크림 탓인지 나도 속이 울렁거려서 앞자리를 포기하고 맨 뒤로 갔다. 뒷자리는 요동이 훨씬 약하다. 처음 간 백령도는 관광지가 아니었다. 섬이지만 어업이 아닌 70% 논농사가 주업이며, 대표음식도 해산물이 아닌 메밀냉면과 메밀칼국수다. 군인이 주민보다 많다. 서울보다 평양이 가까운 서쪽의 땅 끝, 우리 땅을..

고전적 정수기 / 침묵 - 노정숙

고전적 정수기 노정숙 모던한 아파트 주방 안쪽에 둥글넙적한 물항아리가 턱 앉아계신다 아침이면 환하게 엘이디 등불을 물 위에 띄우신다 어미는 고개 숙여 물 한바가지 퍼올린다 저 지극하게 굽은 어미의 등, 모든 어미는 머리 조아리기 선수다 쉿! 조왕신이 기침하신다 침묵 노정숙 반복하는 묵음 연주, 존 케이지의 에 빠졌다. 고요 속에서 내 숨소리와 한숨소리 모든 숨 붙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격렬한 음을 느낀다. 몸 안 톱니바퀴는 곳곳이 헐거워져 느리게 돌아간다. 나는 나사를 조이려 조바심치지 않는다. 낡아서야 벙그는 묵음의 세계, 위로의 손길이 스민다. 2022년 여름호. 통권 40호

성녀와 친구 / 노정숙

성녀와 친구 노정숙 지난주에 친구 자임에게 《아벨라의 성녀 데레사 자서전》과 온열 양말을 선물 받았다. 솔직히 이런 책은 부담이 간다. 단정한 자세로 읽어야 할 것 같고, 분명 부실한 내 기도생활을 자책하게 될 것이다. 500년 전에 살다간 성녀 데레사가 하느님을 만나며 느낀 환시와 신비를 기록했다. 19세에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고 병고와 회의, 고통을 겪으면서 서서히 기도와 관상의 힘을 깨닫게 된다. 교회로부터 기도 신학의 탁월한 권위자로 인정받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교회학자가 되었다. 어떤 일을 할 때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실행에 옮기라고 권하는 것은 순정한 믿음에서 나온다고 한다. 아무런 공로도 없이 강력한 은총을 믿는 것 또한 은총이다. 스스로 아무 선행도 한 일이 없고 가난하다는 것을 ..

5천 원과 5만 원 / 노정숙

5천 원과 5만 원 노정숙 조*자 님이 문우 셋과 만났다. 중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자꾸 두리번거린다. 홀 서빙을 하고 있는 한 청년을 부른다. 다정한 말씨로 “내가 지금 이곳 사람들을 살펴보니 자네가 참 열심히 일을 하네. 자네는 앞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될 걸세.” 대강 이런 말을 하며 신권 5천 원짜리 한 장을 건넨다. 청년은 꾸벅 인사를 한다. 모르는 누군가에게 힘을 주기 위해 항상 5천 원짜리 신권을 얼마간 준비해서 다닌다. 전에는 운전을 했고, 한동안은 기사를 대동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외출이 잦지 않으니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 70대 그의 배낭 안에는 늘 선물이 가득하다. 특별한 떡이나 참기름, 양말 등 만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을 넣고 나온다. 팬데믹이 있기 전, 문학행사에도 그냥 가는..

짧은 수다 / 노정숙

짧은 수다 노정숙 생텍쥐페리는 감탄을 잘하는 행복한 아이였대요. 인생의 역경이 그를 지각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항공로가 그를 작가로 만들고, 유배가 그를 성자로 만들었대요. 영웅 이상으로, 작가 이상으로, 그의 착한 마음이 가까이 다가왔어요. 착한 마음이 늘 꿈꾸게 하고 희망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좋아하잖아요. 전쟁보다 더 두려운 것은 마음에 희망을 잃는 것이지요. 폐허가 된 촌락, 이산가족, 죽음…. 이런 것들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공동체 정신의 파괴라고 알려주었어요. 감탄을 잘하는 생텍쥐페리는 우리를 무시로 경이로운 세계로 데려다주지요.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면 ‘불운’이 무엇인가 느껴져요. 귀 기울여야 할 것은 비평가의 말이 아니라 자연의 말이라는 것으로 비평가들에게 반감을 샀지요. 시대를..

노천탕에서 / 노정숙

노천탕에서 노정숙 마을버스 은수랑 두 번째 여행 중에 학가산 온천을 들렀다. 안동시에서 만들었다는데 깔끔하고 쾌적하다. 샤워를 하고 노천탕으로 갔다. 넓은 탕에는 두 어르신이 앉아 있다. 서로 어디에 사느냐며 수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 다 안동의 종손며느리로 연륜이 곱게 내려앉았다. 한 분이 손을 내밀며 화려한 네일아트를 자랑하신다. 딸이 생일선물로 해줬는데 앞으로 계속 해야겠다고 하신다. 고우시다고 한껏 칭찬을 해드렸다. 곁에 계신 갸름한 얼굴의 친구 분은 예쁜 건 다 지나갔고, 아픈 곳이나 없으면 좋겠다고 한다. 1900년생 미국의 초상화가 엘리스 닐은 80세에 옷 벗은 자화상을 그렸다. 파란색 줄무늬 의자에 앉아 흰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손에는 붓과 흰 천을 들고 있다. 평론가들은 흰 천이 ..

나를 밟아주세요 / 노정숙

http://koreayouth.or.kr/bbs/board.php?bo_table=a4&wr_id=54 대전청소년 대전청소년 koreayouth.or.kr 나를 밟아주세요 노정숙 허술하던 내 몸이 단단해졌다.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사람들 덕이다.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요즘 들어 왜 그리 나를 좋아하는지.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말에 만보기를 차고 발걸음 숫자를 세는 사람도 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불어도 상관없이 내게로 향하는 사람들 때문에 몸살이 날 지경이다. 언제 변덕을 부릴지 모르지만 사람의 숨결을 가까이 느끼는 지금 행복하다. 내 오른쪽에는 청정하지는 않지만 물이 흐르고 왼쪽에는 잘 다듬어진 잔디와 벌개미취가 한창이다. 꽃도 없이 귀여운 애기땅빈대, 보일 듯 말 듯 수줍은 매듭풀이 잔잔한 ..

격리생활 / 노정숙

격리생활 노정숙 느닷없이 코로나19 확진자가 되어 경기 제7생활소에 들어갔다. 목이 간질거려서 감기약 3일 처방을 받고, 첫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에 엑스레이를 찍는데 혼자다. 조용한 긴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를 탔다. 적막 속에서 휴대폰으로 전하는 지시에 따른다. 이틀 지나니 이곳의 패턴이 다 외워졌다. 아침 7시경이면 방송이 시작된다. 아침식사를 배달할 것이니 복도에서 인기척이 나도 절대 현관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후 준비가 끝났으니 배달된 식사를 속히 방으로 가져가라고 알린다. 한 시간 쯤 지나면 소독을 할 것이니 시끄러워도 문을 절대 열면 안 된다는 방송이 이어진다. 내내 왕왕대는 방송, 인기척에 문을 열면 방역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게 골자다. 아침 8시와 오후 5시,..

두 어머니 / 노정숙

두 어머니 노정숙 꿈결에도 안 오시는 어머니를 생각한다. 떠난 지 20년이 넘은 엄마는 내 꿈에 한 번도 오시지 않았다. 3년 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다. 왜 엄마는 셋째 오빠와 조카며느리 꿈에 다녀가시면서 나만 외면하는 걸까. 어머니도 큰아들에게는 가끔 다녀가신다는데 내겐 안 오신다. 어머니는 나를 마지막까지 알아보셨는데…. 엄마에게도 어머니께도 할 일을 다 해서 아쉬운 게 없다고 여긴 게 괘씸하신 걸까. 한 시간 거리에 살면서도 엄마한테는 날짜를 정해놓고 한 달에 한 번 찾아뵈었다. 가끔 전화를 하면 ‘반보기’는 되었다며 고맙다고 했다. 84세 엄마는 기력은 쇠했으나 맑은 정신이었다. 그러다 하루도 앓지 않고 잠자듯 혼수상태 사흘 만에 돌아가셨다. 새천년을 엄마 장례식장에서 보냈다. 변화무쌍..

선한 그들 / 노정숙

선한 그들 노정숙 바리톤 정경의 오페라마 「우리 가곡 전상서」를 보러갔다. 건물 입구에서 열 체크를 하고, 공연장 앞에서는 QR코드 확인을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무대라서 설렌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넓은 공연장에 의자가 스물 남짓이다. 오페라와 드라마를 합성한 오페라마를 만든 정경 교수는 토, 객, 한, 맥, 연, 한국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주제에 맞춰 한국가곡에 깃든 역사의식을 일깨우며 열창했다. 우리 경제를 일으킨 기성세대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했지만 역사적 배경까지 알리는 이런 노래는 젊은이들이 더 많이 들었으면 좋겠다. 공연 끝부분에 관객의 질문을 받는 시간이 있다. 한 관객이 성악과를 지망하는 고3에게 들려줄 말을 청했다. ‘예술가는 광대로서 남에게 기쁨을 주고 위로를 주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