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수필동아리에서 임헌영 교수님의 <유럽문학기행> 출판기념 모임이 있었다.
책은 미리 사서 읽었다. 문학전집과 백과사전을 머리에 장착한 듯한 교수님의 해박함에 늘 감탄한다.
대문호들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성장과정을 바탕으로 사상은 물론, 사생활과 뒷담화까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슬몃슬몃 나오는 투박한 유머까지 재미있게 읽힌다.
처음 간 <한국산문> 사무실은 오늘 모인 인원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어찌나 열기가 강한지, 난 초반에 지쳤다.
올여름 최강 더위를 느꼈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비가 왔는데...
간단한 식이 끝나고 근처 식당 '궁'에서 점심을 먹고.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동안 20여권 책을 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건 처음이라며 다시 이런 자리 만들지 말라고 하신다.
덕분에 오래 전 함께 공부하던 반가운 얼굴들 만나서 좋았다. 대구, 삼척에서도 왔다.
이 수필동아리 수수밭의 시작에 내가 있었다는 게 새삼스럽다.
2007년부터 옹기종기 꾸리다가, 2010년에 임헌영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시면서 나는 서서히 물러앉았다.
몇몇은 따로 만나기도 하고, 공식 모임은 이렇게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간다.
초대회장으로 한마디 해달란다.
그 시절은 뜨거웠고, 내가 제일 잘한 일은 지도교수를 잘 모셔온것이다.
주문한 차가 나오기 전에 피천득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혹자는 피천득이 맑고 순수하기만 한 수필을 폄하하지만, 그런 수필을 쓰는 저변에는 역사의식이 있기때문이라고,
"피천득이 어렸을 때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된다. 하지만 평생 돈 걱정 안 하게 아버지가 남겨둔 재산이 있었다.
경기 중학 들어갔을 때 머리가 좋아서 월반을 했다. 합격됐다고 신문에 났는데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춘원 이광수였다.
자신도 부자인데 공짜로 먹여주지 피천득을 쌀 두 가마를 받고 하숙시켜준다. 피천득으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3년간 춘원의 형제들과 친형제처럼 지내며 살았다. 상해 유학도 알아봐 주고 아버지처럼 피천득을 보살펴 준 춘원 이광수가
친일한 것에 대해 수필 <춘원>에서 이렇게 썼다. “그(춘원)는 산을 좋아하였다. 여생을 산에서 보내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아깝게도 크나큰 과오를 범하였었다. 1937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더라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을까.”
감옥에서 죽었어야 했다는 말을 한 것이다. 센 사람이다. 나도 이렇게 말은 못한다.
4시 넘으니 체력 방전이 느껴졌다. 교수님도 앉아계시는데... 슬그머니 일어났다.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그날은 급한 일도,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는데.
뒷모임을 생각했던 임, 정에게 더욱 미안하다.
해가 훤한데... 집에 들어오면서 반성했다.
체력을 꾹꾹 눌러 다져서 다음에는 끝까지 남아서 놀자.
발에 쥐가 오르건 말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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