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혼바람 나다

칠부능선 2014. 9. 29. 22:01

 

혼바람나다

노정숙

 

쪽지의 위력

 

자동차 앞 유리에 쪽지가 붙어 있다.

 

전날 일렬 주차하였으면 다음날 일찍 제대로 주차해 놓는 것이 도리입니다. 앞으로 주시해서 지켜보겠습니다.

 

나는 졸지에 도리를 모르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쳇, 그깟 일로 쪽지를 남기는 건 뭔가. 게다가 도리까지 운운하는 건 과하다.

더욱이 앞으로 주시해 지켜보겠다니 뒤통수가 뜨끔하다.

늦게 들어온 날이면 아파트 지하주차장은 만원이다. 하는 수없이 일렬주차를 한다. 나도 남의 차를 밀어보았지만 이런 쪽지를 남길 생각은 해 본적이 없다.

가끔 기어를 중립위치에 두지 않은 차주에게 옮겨달라고 전화한 일은 있다. 그러나 그런 불편조차 군말 없이 넘겼다.

자주 염치없는 사람, 아니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만난다.

새치기 하는 사람, 버스나 전철에서 큰소리로 통화하는 사람, 이런 꼴불견도 나는 눈총을 쏘거나 입을 떼 본 일이 없다.

멀쩡한 산을 깎고 강을 죽이는 이, 생명을 업신여기고 물신을 섬기는 이, 이런 큰 짓을 하는 사람들에게 부아가 치민다.

답답한 마음에 광장에 나가 보았지만 점잖게 촛불만 바라보았다. 남 앞에서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나는 늘 의젓한 체하며 눈 감고 넘어갔다.

그러나 그 일이 있은 후, 아침 일찍 일이 없는 날에도 허둥지둥 자동차 키를 챙겨나간다.

내 게으름과 비겁을 더 이상 너그러움으로 포장할 수 없게 되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쪽지가 죽비가 되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흙먼지 풀풀 날리는 중국의 한촌,

빨간 윗옷을 입은 긴 머리의 여자 버스기사가 승객을 태우고 달리는데 마른 체구의 젊은 남자가 차를 세웠다.

기사에게 반갑게 이야길 시키나 가서 앉으라고 했다. 한참 후, 두 사람이 차를 세우고 올라탔는데 그들이 강도로 돌변했다.

칼을 휘두르며 기사와 승객의 돈을 갈취했다. 그리고 여자 기사를 끌고 내려가 폭행하며 풀숲으로 들어갔다.

젊은 남자가 승객들에게 함께 돕길 청했지만 모두 외면했다. 그는 혼자 나가서 강도를 말렸으나 다리를 칼에 맞고 쓰러졌다.

그러는 동안 차 안의 많은 승객들은 창밖으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얼마 후, 강도는 도망가고 여자 기사는 피 묻은 얼굴에 헝클어진 모습으로 차에 올라탔다. 말없이 경멸과 원망의 눈으로 승객들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핸들을 잡고 잠시 흐느꼈다.

쓰러졌던 남자가 절룩이며 다가와 차를 타려는데 여자 기사는 차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창문으로 그의 가방을 던져주었다.

도와주려고 했던 남자는 허탈해 했다. 남자를 버려두고 버스는 출발했다.

절룩이며 걷던 남자는 지나가는 지프를 얻어 타고 가다가 경찰차들이 서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 버스가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독립영화 <버스 44>의 내용이다.

2001년도 국제영화제에서 여러 상을 탄 작품인데 세월호 사건 후 다시 부각되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의 최후, 침묵하는 방관자의 말로를 보여준다. 분노해야할 때 분노하지 않는 사람의 미래는 비극이다.

사람들은 작은 일이라도 자신에게 피해를 주면 바로 반응하지만, 세상을 흔드는 큰일이라도 자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아닐 때에는 무심하다.

더욱이 가슴 아픈 일일수록 직면하기를 꺼린다. 남의 고통에 대해 처음에는 슬픔과 분노를 함께 하지만, 날이 지나면 흐려진다.

도킨스의 진화론에 의하면 사람은 이기적 유전자가 우세하게 태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같은 종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한다.

유전자의 이기성이 종의 영속을 위한 것이라면 희망은 있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가 보다. 모든 인간이 같은 종족이라는 것을 인식하기까지 진화가 더 필요한가 보다.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지만 쪽지를 남기는 건 의로운 행동이다. 불의를 보고 버스에서 내린 젊은 남자도 이타적 행동을 했다.

짧은 영화 속 허름한 장면들이 남의 일에 무심했던 내게 죽비가 되었다.

분주한 궁리나 허황한 말치레보다 몸을 움직여라, 움직여라. 낮은 소리가 검질기게 따라붙는다.

 

<에세이문학> 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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