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정숙의 <바람, 바람> 3
추추추
추모
커다란 배가 기울었다. 서서히 주저앉는 것을 속수무책 바라보았다. 비현실적인 장면이 가슴에 박혔다.
책임져야 하는 이들은 꼬리를 감추고, 물신을 섬기는 자들은 네 탓이여 네 탓이여 하며 손가락 총만 쏘아댄다.
생명밖에 소중한 게 없는 이들은 내 탓이요 내 탓이요 가슴을 친다.
멀쩡하던 나무가 쓰러진 적이 있었다. 우리는 쓰러지고 나서야 뿌리가 썩고 있었던 것을 알았다.
도처에 널린 예비 된 죽음들, 귀한 것은 속절없이 간다.
추수
미안하다. 잘 익은 사과가 볼 붉히며 입을 뗀다. 단물 흥건한 복숭아는 고개를 숙인다.
속내를 감춘 알밤도 발아래 엎드린다. 봄 내내 눈물 바람으로 뿌린 씨앗, 푹푹 여름 흐느끼며 속을 채웠다.
올해는 전에 없던 간기가 배었을 게다.
분주한 타작마당엔 알곡 보다 쭉정이가 많다.
산자는 다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가끔 하늘도 본다. 말을 엮고 몸을 섞으며 하루하루를 지운다.
거둘수록 더하는 허기, 참담했던 시간의 발자국마저 염치없다. 미안하다.
추억
몽골에서 말을 탔기 전, 그의 눈을 맞추고 긴 허리를 쓰다듬으며 인사를 했다.
신전을 떠받치는 기둥 같은 강건한 다리, 다부진 발목, 휘날리는 말갈기는 가슴이 뛸 만큼 근사하다.
떠나간 한 무리의 거친 숨소리를 떠올리며 그의 등에 다리를 휘감았다.
허브벌판을 달리며 풍겨오는 향에 까무룩 취했다.
고삐를 잘 잡아야 해.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해, 우레 같은 이명에 박차를 가한다.
말고삐를 잡고 추추추, 재촉을 하면 말은 세게 달린다.
광야를 거쳐 사막을 지나 추추추, 고이 보내지 못한 너를 향해 추추추. 추추추.
<현대수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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