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내 자리 꽃자리

칠부능선 2014. 9. 29. 21:49

테마수필 - 경쟁, 그 끝없는 질주

 

내 자리 꽃자리

 

 

노정숙

 

내가 처음 경쟁에서 탈락된 게 중학교 입학시험이다. 오빠들은 시험에서 탈락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며 한참을 놀려댔다. 내가 원하던 학교를 가지 못하고 나를 받아주는 학교에 들어갔다. 겸연쩍고 부끄러웠지만 그곳에도 좋은 선생님과 똘똘한 친구들이 많았다.

과외공부까지 하면서 입학시험에 대비하던 초등학생 때 보다 헐렁한 중학생이 되었다. 겉으로는 모범생 비슷한 길을 걸었지만 내 책상에는 교과서보다 잡다한 책이 많았고, 학년을 마치고 올라갈 때까지 참고서와 문제집은 깨끗했다.

일찍이 맛본 패배감은 내게 치열함을 앗아갔다. 무슨 일이건 절박할 것이 없다는 것은 미리 본 답안지와 같이 맥빠지는 일이다. 최선 다음엔 항상 차선이 있다는 것을 일찍 알게 되었다. 그 차선도 쓸 만한 것이어서 그때부터 느슨하게 사는 게 몸에 붙었다.

경쟁자로 삼아 나를 다그칠 대상은 많았다.

머리숱이 많은 정수, 억세고 굵은 머리카락처럼 마음도 실하다. 공부건 일이건 한번 시작한 것은 끝을 본다. 전문가 수준에 다다라야 성에 찼다. 정수를 보며 부러운 마음보다 숨이 찼다. 그의 결과물은 계속 업그레이드되었다. 시샘은커녕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었다.

미인대회에 나갈 만큼 빼어난 미모의 진희, 겉처럼 속도 곱다. 엄마를 갑자기 여윈 상처를 호스피스로 봉사하며 극복하고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온갖 것을 나누는 손도 크다. 진희를 보면 그저 경의를 표할 뿐이다.

미모가 되면 머리가 모자라든지. 성질이라도 고약해야 공평하지 않은가. 돌아보면 모두 갖춘 사람들이 후덕하기까지 하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건 일찍이 눈치 챘지만 이들을 바라보면 씁쓸하다. 따라갈 수 없는 치열한 정신력과 바꿀 수 없는 외모를 어찌 경쟁의 대상으로 삼겠는가.

경쟁이 없는 사회는 없다. 경쟁 속에서 경쟁이 아닌 듯, 무디게 사는 것도 내 나름의 약은 수다.

TV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을 보면 동물들의 경쟁은 참혹하다. 강한자만이 살아남는 처절한 현장이다. 오랜 세월 동안 치타는 가젤을 잘 잡을 수 있도록 진화해 왔다. 가젤은 치타로부터 잘 피할 수 있도록 진화해 왔다. 이처럼 쫒고 쫒기는 경쟁을 ‘붉은 여왕의 효과’라고 한다. 진화학자가 한 이 말은 어떤 대상이 변화하더라도 주변 환경이나 경쟁대상이 더 빠르게 변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뒤처지게 되는 원리를 말한다. 생물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도태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치타도 가젤도 언제까지 전력질주 할 수는 없다. 서로 눈치를 보아가며 쉬어야 한다.

우리는 힘껏 달려야 겨우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붉은 여왕의 덫에 걸려들었다. 레이스에서 튕겨나가지 않으려고 쉼 없이 내박차고 있다. 나는 밥을 짓고 사람들을 만나고 정을 나누는 쳇바퀴를 돌리고 있다. 가끔 속력을 늦추고 의미를 붙이는 자 만이 행복이나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제자리 놀음이다.

경쟁競爭, 다투고 다투는 일이다. 그 승산 없는 일에 질주까지 하고 있다. 질주疾走란 이미 병증病症이다. 사람은 타고난 그릇이 제각기 다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담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일찍이 누구와도 다투기를 포기했다.

출중한 아들 셋에 끝물로 태어난 탓인가. 자주 몽상에 빠지는 나를 건져 올려야 했다. 셈도 어둔하다. 대책 없이 숫자가 엉키는 순간을 잘 누르고 다스려야 한다. 머리보다 먼저 나가는 몸과 마음보다 먼저 터지는 말을 다잡아야 한다. 정신 바짝 차려야 여문 사람들의 손가락 총에서 비켜날 수 있다. 크고 작은 투정도 단박에 무지르며 건둥건둥 하루하루를 지운다.

나는 나에게 너그럽기로 했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은 없다. 힘든 일에 부딪치면 이겨나가려고 애쓰기보다 한 발 물러선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밀려나고 나를 허락하는 자리에 앉으면서도 그것이 최선이라고 세뇌시킨다.

장미 백합만 예쁜가, 호박꽃 도라지꽃도 어여쁘다. 호박꽃 도라지꽃은 눈 호사만 아니고 입 호사까지 시켜준다. 앞자리가 언제나 좋은 건 아니다. 뒷전에서 얻은 슬기와 그늘에서 배운 힘은 속으로 쌓인다. 때론 힘을 빼는 것이 윗수라는 것도 알았다. 나름 영악하다.

내가 극복해야 할 상대는 바로 나 자신이다.

 

<수필과비평>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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