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노정숙의 <시간> 따라잡기 / 윤성근

칠부능선 2014. 7. 21. 16:00

압축과 은유, 그 조화의 아름다움

- 노정숙의 <시간> 따라잡기

 

                                                                                                                                                                             윤성근


청색시대 20, <20>은 변화를 추구하는「현대수필」의 의지를 뚜렷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다. 우선 아포리즘 수필의 참여가 두드러진 것이 이를 증명한다. 전통수필도 그 형식이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압축과 은유를 많이 활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확실한 변화다. 새로운 것을 원하는 수필 독자의 취향에 부응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노정숙은 이러한 수필 변화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그의 작품 <시간>을 통해 그가 시도하는 변화의 실체를 알아보자. <시간>은 단 3행으로 꾸며진 수필이다. 이 작가의 수필 작품 중 가장 짧은 글일 것이다. 아니 우리나라에서 발표된 모든 수필 중 단어를 가장 적게 사용하여 완성한 작품 일지도 모른다.


우선은 파격이 놀랍다. 느낌은 산뜻하고 가뿐하다. 그런데도 속이 깊다. 표현은 짧고 명료하지만 품은 뜻이 깊어 울림이 길다. 작가는 단 석 줄의 짧은 이야기를 슬쩍 던져놓고 시치미를 떼고 있지만, 독자를 숨은 그림 찾기 게임에 몰입하도록 유도한다.

제목을 포함한 22개의 단어와 3개의 마침표 그리고 2개의 쉼표 속에 감추어 놓은 뜻을 읽는 이 각자의 취향에 맞추어 추적하며 풀어내야 하는 게임이다. 생각이 같을 수 없는 독자는 제각기 다른 작품을 읽고 있음이다. 같은 글이되 느낌은 다르고, 다른 느낌이되 같은 글이다. 이 작품이 지닌 매력이다.


우리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각과 시각의 간격을 뜻하는 객관적 의미는 누구에게나 같은 뜻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개인이 느끼는 시간의 주관적 개념은 사람 따라, 상황 따라 각양각색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자신의 생활에 걸맞게 적용하려고 애를 쓴다. 사람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작품 속에 숨겨놓은 작가의 시간을 추적해 보자. 아무래도 작가는 지나온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큰 것 같다. 작품의 무대 장례식장이 이를 암시한다. 장례식장이란 죽은 이의 생애를 회고하며,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는 곳이다. 돌아보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아쉽기 마련이다. 작가는 자신의 생각도 이러한 일반적 통념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넌지시 이야기한다. 조문의 예를 갖추며 자신은 벌써 많은 시간을 살아왔고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님을 고백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무릎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나이 들었음을 나타내는 징표이지만, 이를 감지하는 장소로 장례식장을 택한 것은 이제 자신도 노인(?) 대열에 합류했음을 인정하는 은유로 보아 좋을 것이다. 장례식장은 우리가 생활 중에 거쳐야 하는 다른 어느 곳 보다 생기 잃은 늙은 장소로 인식되어 있지 않는가.


“무릎에서 똑, 또드득 소리가 나는” 것을 알아차린 작가는 동년배쯤 될 것으로 추정되는 상주와 “젖은 눈을 맞대고 멋쩍게 웃는다.” 이는 서로 나이 들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멋쩍게 웃는” 행위는 크게 환영할 일은 아니어도 긍정한다는 뜻 아니던가.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이 들었음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는 편안함을 보이기도 한다. “내 뼈마디도 이제, 스스로 우는 법을 알았나 보다.” 라며 남의 이야기 하듯 딴전을 편다. 뼈마디가 스스로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데 낸들 어쩌겠냐며 쿨 하게 받아들인다. 자연현상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순리를 본다.


평론가 박양근은 노정숙의 작품집『바람, 바람』을 두고 “산문시를 연상시키는 짧은 글” 이라 평하며(현대수필 89), 수필의 변화를 위한 긍정적 시도를 환영하고 있다. 작가 자신도 (바람, 바람에서 작가의 말을 통해) “지난 십여 년간 쓴 글을 <아포리즘 에세이>로 정리했다”고 술회한다. 아포리즘 수필의 개척 내지는 자리 매김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작품 <시간> 은 『바람, 바람』에 수록된 80편의 작품과 맥을 같이한다. 기발한 아이디어에 바탕을 둔 은유가 읽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이를 두고 언어의 연금술이라 하는 것인지. 형식의 주체는 은유와 압축이다. 최대한 농축된 문장은 간결하지만 촌철살인의 번쩍임을 보인다.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더러는 키 작은 독자가 까치발을 하고도 그 숨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해 책을 폈다 덮었다 하기도 한다. 혹시 압축이 지나친 때문은 아닐까.


아포리즘 수필. 이를 대하는 우리는 가끔 외국인이 구사하는 한국말을 듣는 것처럼 느껴기도 한다. 유창하지만 어딘지 이질감이 느껴지는 뭐 그런…. 시와 전통수필의 중간쯤 어디에서, 한 쪽엔 운문을 다른 한 쪽엔 산문을 잡은 채 버티고 서 있은 어정쩡한(?) 위상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부정적인 요인으로 치부할 이유는 없다. 다만 빠른 정착으로 대중화가 필요할 뿐이다. 동이 터오는 새벽을 두고 낮이냐 밤이냐 구별하려 고집한다면, 어휘 ‘새벽’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새로운 수필운동에 앞장선 모두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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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노정숙

 

     장례식장에서 상주와 맞절을 하는데 무릎에서 똑, 또드득 소리가 난다.

     젖은 눈 맞대고 멋쩍게 웃는다.

     내 뼈마디도 이제, 제 스스로 우는 법을 알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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