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 청산도
노정숙
사방이 푸르다.
하늘과 바다가 제 색을 한껏 드러내고, 청보리와 밀밭이 온몸으로 물결친다. 어느 곳을 바라봐도 파랑과 초록, 힐링 색이 지천이다. 청산도는 어촌 특유의 비린내보다 산촌의 흙내음이 난다. 바람은 순하고 햇살은 부드럽다. 공기의 맛이 달라 심호흡이 절로 되니 먼 길을 달려온 보람이 있다.
단정하게 선 나무 표지판들도 정겹다. 방향에 따라 남은 거리를 알려주니 초행길이라도 안심이 된다. 자주 만나는 달팽이 모양의 안내판은 빨라지는 발걸음을 슬며시 붙잡는다.
걷는 길 중간 중간에 있는 조형물 ‘느림의 종’은 긴 줄을 바람에 맡기고 한가로이 흔들거린다. 지루하던 수업시간 마침을 알리는 종소리는 얼마나 반가웠던가. 이곳의 종을 바라보며 분주했던 일상에 쉼표를 찍는다.
동촌리 바닷가에서 기역자로 꺾인 나무를 만났다. 폭풍을 이겨낸 강한 생명력이다. 언덕 위에 노란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유채꽃 무리는 다른 세상이다. 폭풍우 지나면 꽃 시절 돌아오는 세상사 같다. 그저 흘러가는 것에 마음을 부린다.
관광버스들이 서있는 상서마을은 조선 인조 때 난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싸리울 문에 걸린 삐딱 글씨 문패에 눈길이 머문다. 육지에서 온 사람들은 척박한 땅에 돌을 쌓고 그 위에 흙을 쌓아 구들장 논을 만들어 논농사도 지었다. 섬에서 귀한 쌀을 얻었다. 진흙을 쓰지 않고 돌로만 쌓은 담은 바람에게 길을 내주어서 쓰러지지 않고 제 구실을 한다. 돌담을 촘촘히 감은 담쟁이넝쿨 폼이 경계 태세다.
숙소로 잡은 한옥 펜션 동네. 새로 지은 집안은 정갈하고 창호문살이 운치 있다. 마당은 아직 진흙이 마르지 않은 정자와 듬성한 잔디도 느리게 느리게 자리를 잡을 것이다. 이곳에서 속력을 내는 건 오직 손님맞이 준비뿐이다.
서편제 촬영지로 올라가는 길이 쭉 곧은 시멘트로 미장을 했다. 구불구불한 흙길을 걷고 싶었는데 아쉬웠다. 정상에 다다르기 전, 여유롭게 휘어진 계단식 밭에서 소가 쟁기질을 하고 있다. 살집 좋은 누렁소는 쥔장의 지시에 따라 고랑을 고르게 파 놓았다. 소걸음을 흉내 내며 나도 슬렁거리며 올라간다. 익숙한 풍경에서도 자유를 만난다.
초가지붕이 내려다보이는 서편제 공원 정상에 커다란 대리석 흉상胸像이 번쩍인다. 사람 좋게 웃고 있는 그는 현 완도군수라고 한다. 흉상을 둘러싼 대리석 양편에는 군수의 출생에서 현재까지의 행적과 기금을 낸 사람들의 이름이 줄줄이 새겨있다. 아무리 봐도 흉상兇狀이다. 무명의 청산도를 슬로시티로 제정케 해서 밖에 알려준 것이 고마워 주민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자연과 어울리는 방법은 없었을까. 공연히 내 낯이 뜨겁다. 군수의 공과功過나 면목面目은 모르지만, 그의 공덕을 되레 욕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
서편제 세트장 안에 있는 주막에 앉았다. 조록조록 주름 깊은 할머니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내다준 막걸리 맛은 진했고, 쑥파전도 향긋했다.
어지러운 심사에 취기는 오지 않고, 조선 선비 연암 박지원이 떠올랐다. 그는 안의 현감을 하는 동안에 제방의 둑을 쌓고, 물레방아를 실용화해서 굶주린 백성을 구휼했다. 연암이 임기를 마치고 안의마을을 떠날 때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겠다고 했다. 연암은 송덕비를 세우면 그 비碑를 땅에 묻겠다며 끝내 사양했다. 후대에 와서 그 자리에 사적비가 세워졌다. 연암은 양양 부사로 양양의 수려한 경치를 마음껏 누리며 공직 생활을 갈무리했다. 후에 사람들과 녹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양양은 어떠했는지를 묻자 “일만 이천 냥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놀라자 “바다와 산의 빼어난 경치가 일만 냥 가치가 되고 녹봉이 이천 냥이다”고 했다. 자연과 사물의 가치를 잘 알고 존중하며 조화를 이루는 것을 최고로 여겼다. 연암이 청산도를 바라보며 지을 표정을 생각하니 면구스럽다.
슬로시티는 5만 명 이하의 인구가 수공업과 조리법을 전통방식대로 보전하고 고유의 문화유산을 지키며 사는 곳이다. 그로 인해 관광객이 늘어 주민들의 생활이 나아졌다면 그것을 보존해야 할 의무도 있다.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 청청한 공기, 시간을 몸에 새긴 몽돌이 널린 해변과 부드러운 능선을 거느린 청산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천혜의 자원이다.
풍광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심성은 닮았다. 순한 눈빛의 노인이 느린 걸음으로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비로소 풍경이 완성된다. 즐거이 풍경을 포식한다.
자연과 한 몸이 되는 청정 슬로시티 - 느림을 통해 재충전하는 그곳, 마음마저 푸르게 물드는 그곳, 다시 가고 싶은 그곳으로 새겨지기를.
<한국동서문학> 여름호
'수필. 시 -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안하다, 그대 (0) | 2014.07.23 |
---|---|
노정숙의 <시간> 따라잡기 / 윤성근 (0) | 2014.07.21 |
여자의 땅 (0) | 2014.06.13 |
두 사람 (0) | 2014.06.12 |
하하하 (0) | 2014.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