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 남자
남진우
여기 한 그루 책이 있다
뿌리부터 줄기까지 잘 가꿔진 책
페이지를 넘기면 잎사귀들이 푸르게 반짝이며
제 속에 숨어 있는 나이테를 알아달라고 손짓한다
나는 매일 한 그루씩 책을 베어 넘긴다
피도 흘리지 않고서 책들은 고요히 쓰러진다
아니면 한 장씩 찢어 입에 넣고 오래 우물거린다
이 나무의 성분을 나는 짐작하지도 못하겠다
글자들의 푸른 잎맥을 따라가다가
간혹 벌레가 파먹는 자리를 발견할 때도 있다
비록 이 나무는 꽃도 열매도 맺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시원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여기 한 그루 책이 있다
책이 덩굴을 내밀어 내 몸을 휘감아오른다
무수한 문장들이 내 몸에 알 수 없는 무늬를 새기며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아무리 베어내도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책나무
책나무 속에 들어가 눕는다
내 속에 뿌리 뻗은 나무에서 일제히 날아오르는
저 눈부신 새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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