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 필사

책읽는 남자 / 남진우

칠부능선 2013. 8. 2. 00:29

책읽는 남자

 

남진우

 

 

 

여기 한 그루 책이 있다

뿌리부터 줄기까지 잘 가꿔진 책

페이지를 넘기면 잎사귀들이 푸르게 반짝이며

제 속에 숨어 있는 나이테를 알아달라고 손짓한다

나는 매일 한 그루씩 책을 베어 넘긴다

피도 흘리지 않고서 책들은 고요히 쓰러진다

아니면 한 장씩 찢어 입에 넣고 오래 우물거린다

이 나무의 성분을 나는 짐작하지도 못하겠다

글자들의 푸른 잎맥을 따라가다가

간혹 벌레가 파먹는 자리를 발견할 때도 있다

비록 이 나무는 꽃도 열매도 맺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시원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여기 한 그루 책이 있다

책이 덩굴을 내밀어 내 몸을 휘감아오른다

무수한 문장들이 내 몸에 알 수 없는 무늬를 새기며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아무리 베어내도

무성하게 자라 오르는 책나무

책나무 속에 들어가 눕는다

내 속에 뿌리 뻗은 나무에서 일제히 날아오르는

저 눈부신 새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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