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너는 여자
강은교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는다. 런닝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그 여자는 이제 아기 원피스를 넌다.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 여자의 무용은 끝났다. 그 여자는 뛰어간다. 구름을 들고.
...... 그런데 문제는 첫 행의 '바리움'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나는 그 단어를 처음엔 나도 모르게 썼습니다만, 보다 객관적이 되어 자꾸 읽다보니 영 마음에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움'은 일반적으로 수사(修辭)로 쓰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빼버렸습니다. 그러나 시집을 정리하다 보니 영 싱거웠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여자의 살이라든가 일생이 달려와 담요 옆에 걸린다는 이미지가 살아나오질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다음 행을 빼버리게 되고, 다음 행을 빼버리니 그 다음 행도 빼버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시가 한 행도 남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다시 집어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행의 시구들이 다시 원래의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그러기를 수십 차례 하다가 결국 '바리움'을 넣기로 하였습니다.
시집이 나온 다음 한 어학 선생님이 나에게 농담했습니다. "바리움이 수면제죠? 그런 것도 모르면서 현대시를 분석하느냐고 학생들을 야단쳤죠......."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농담조로 "바리움은 수면제가 아니라 항경련제인데, 한 100알 쯤 먹어본 때가 있었죠....자살하려구요....." 그날 저녁 나는 내가 왜 '바리움'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쓰고 싶었는지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거기에는 내 젊은 날이 묻어있었던 것입니다. 나도 잊어버린 어떤 날들, 그러니까 나의 한 생애가 거기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빨래 너는 여자와 그 여자 곁의 허공과 살과 담요, 그런 것들과 다 연결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강은교)
[출처] 빨래 너는 여자 / 강은교|작성자 머거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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