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 - 발표작

오동도, 오동도

칠부능선 2012. 11. 8. 08:41

 

오동도 오동도

 

노정숙

 

8월의 폭염 속에 오동도에 갔다.

배를 타지 않고 방파제를 걸으면 섬으로 연결된다. 바다는 지척이지만 몸 담글 수 없으니 더위를 식혀주지 못한다. 동백꽃 없는 동백열차도 한낮의 열기에 늘어졌다. 시간을 기다리느니 움직이는 것이 낫다 싶어 걸었다. 오동잎 모양이라는 오동도에서 오동잎을 떠올리기보다 나는 동백꽃을 떠올렸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동백 철이었다. 만개한 동백이 툭툭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 바닥에 펼쳐진 동백도 색을 놓지 않아 어쩌면 매달려 있는 꽃보다 아름다웠다. 배경색이 그윽해서 일까. 그때의 풍경이 선연히 살아난다.

머리에 열기를 고스란히 받으며 산책길을 오른다. 아름드리 후박나무에서 시원한 기운을 받는다. 3천여 그루의 동백과 신이대 등 아열대 식물들이 원시림을 이루어고 있다.

대나무 터널을 지나며 긴 숨을 들이쉰다. 섬 안의 신이대는 충무공이 임란 때 화살을 만들어 왜구를 무찔렀단다. 어릴 적 고향 뒷산에서 보던 대나무는 하늘을 찌르듯 울울창창했다. 키 작은 이곳 대나무는 적당히 휘어지며 서로 엉켜있어 정겹다. 그러면서도 창날의 소임을 다했으니 기특하기도 하다. 권위와 허식을 버린 선비처럼 편안해 보인다.

그늘의 고마움을 한껏 즐기며 동백나무 군락에 들어섰다. 오동도의 전설을 떠올린다. 멀고 먼 옛날 오동숲 우거진 이 섬에 금빛 봉황이 날아와 오동열매를 따 먹으며 놀았는데 봉황이 깃든 곳에는 새 임금이 나신다는 소문이 돌자 왕은 오동숲을 베어버리라고 명했단다. 그 시절 절대 군주였을 왕이 그렇게 자신감이 없었단 말인가. 애먼 오동숲만 날아갔다. 실없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는다. 오동숲이 없어진 후 귀양 온 부부가 농사를 짓고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다정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고기잡이 나간 사이에 도적이 들어, 아내는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낭벼랑 창파에 몸을 던졌단다. 이후 아내가 떨어진 자리에서 핏빛 동백꽃이 피어나고 푸른 정절을 상징하는 신이대가 자라났다고 한다.

기개 출중한 동백꽃은 활짝 벌어지지 않고 적당히 피어 고개를 탁, 꺾고 떨어진다. 꽃잎은 흩어지지 않은 온전한 꽃봉오리 그대로 단호하게 생을 마친다. 떨어진 채로 보름 정도는 시들지 않는 동백, 부인의 못 다한 사랑의 한인 양 여겨진다. 그야말로 고전의 향이 물씬한 전설이다.

숲 사이로 보이는 바다는 한결 낭만적이다. 허허바다를 바라볼 때의 막막함이 없다. 앵글에 걸린 소나무가지가 망망 바다를 만만하게 끌어안는다. 바람에서 바다향이 난다. 훅하고 휘감기는 갯내음이 싱그럽다.

산책로 울타리에 나무색 판넬이 단정하게 걸려있다. 낯익은 시인들의 시구에 혹한다.

 

수줍은 촌색시의 동백이 지는 날 / 어쩌자고 내 가슴은 온통 / 진탕되어가나

매양 / 사랑이라 불리는 / 저 섬은

꽃그늘에 묻혀, / 사나흘 / 가버린 사랑을 앓아도 좋겠다

 

어쩌자고, 어찌하라고 진탕 사랑해보지 못한 가슴을 후비는지. 저 시구들이 자꾸 발길을 잡는다. 에이, 꽃만도 못한 자. 서늘해진 가슴으로 나무 계단을 내려온다.

옆에 있던 훤칠한 남자는 자꾸 식물들의 생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희귀한 식물의 이름도 척척 알고, 과학적인 근거를 열거하면서 내 빈약한 상식을 넓혀준다. 때로는 울렁거리는 마음이 일지 않는 것도 좋은 일이다. 평안함, 에너지가 필요 없는 참 고마운 감정이기도 하다.

내려오는 길, 음악분수가 춤추고 있다. 긴 놈 짧은 놈, 옆으로 휘어지는 놈 - 솟구치다 잦아들며 출렁출렁, 물줄기가 흥겹게 휘몰이장단에 온 몸을 던진다. 내 안에서도 무언가 넘실거리며 달려온다. 온몸을 던져야 할 일을 생각하게 한다.

오동도 오동도, 제 멋에 겨운 오동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래오래 빛나기를, 신이대의 기개와 동백의 열정을 뒤로하고 폭염 속을 걷는다.

 

  <2012 여수 수필의날 기념지>

 

 

'수필. 시 -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못난이 백서  (0) 2012.12.27
나를 받아주세요  (0) 2012.11.21
아무도 모른다  (0) 2012.11.08
사람, 사랑 사랑  (0) 2012.07.05
우정의 기술   (0) 2012.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