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수필> 2012년 여름호 - 문화클릭
우정의 기술
노정숙
연극 ‘아트'는 배우 출신의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가 요즘 남자들의 우정을 코믹하게 그렸다.
무대 뒷벽에 흰 패널이 하나 걸려 있다.
잘나가는 청담동 피부과 의사, 수현이 2억 8천만 원을 주고 산 ‘앙트로와’라는 현대 추상화가의 그림이다. 지방대 교수인 그의 친구 규태는
그저 흰 판때기로밖에 안 보이는 그림을 산 수현이 지적 허영을 부리는 것이라며 비웃는다. 수현은 규태의 태도에 불괘해 한다.
둘 사이는 서먹해지고 또 다른 친구인 문방구 사장 덕수에게 각자의 입장을 털어놓는다. 무던한 성격의 덕수는 수현과 규태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노력은 빗나가기만 하고 오히려 세 친구들 사이에 숨겨졌던 감정들이 폭발하고 만다.
20년 지기라는 이들은 서로를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림 한 점 때문에 서로에 대한 질투와 서운함을 쏟아낸다. 서로의 예술관을 비웃고,
아내를 모욕하기도 하며 그 동안 묵혀왔던 치졸한 이면이 드러난다.
아무리 성격이 좋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사는 전세 값보다 비싼 그림을 살 수 있는 친구의 능력에 약 오르고, 내가 넘볼 수 없는 지위에 오른
친구를 보면 배알이 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열등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능력을 발휘 못하는 어려운 처지의 친구를 보는 것 보다 낫지 않은가.
열등감을 극복하는 것이 자존심이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스스로 장하게 여기고 만족하면 된다.
어려서 친구는 참 좋다. 이해관계가 없는 시절의 만남이다. 그런 친구들이 사회에 나가면서 다른 모습이 된다.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명성을 얻은 친구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힘들게 사는 친구로 나뉜다. 돈이나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사는 모습이 달라지면서
관계가 멀어지기도 한다.
이들의 우정을 보면서 연암이 떠올랐다. 박지원은 관직을 멀리해서 돈을 벌지 못했음에도 좋은 벗들과 어울려 주유천하 하면서 시대를 풍자했다.
친구에게 돈을 꾸면서 오고가는 짧은 글들은 돈이라는 말없이 빌리는 이의 겸연쩍음과 빌려주는 이의 너그러움과 재치에 무릎을 치게 한다.
그러나 연암이 쓴 <여경보>란 편지에는 점잖게 벗을 거절하는 구절이 나온다.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가까이 사는 인연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천고(千古)의 위를 벗 삼고, 백세(百世) 뒤에 올 사람을 믿는 것이 낫다고 한다. 이는 너하고는 생각도 다르고 뜻이 달라 안 놀겠다는 말이다.
오래전 그 시절부터도 친구의 사귐을 권세와 명예, 이익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변함없는 좋은 친구를 알아보는 것이 능력이며 기술이다.
어른이 된 후의 친구는 선택이다. 같은 이상을 가진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된다. 그러나 함께 보낸 시간에 비례해서 우정이 쌓이기도 하지만,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이나 가치관이 드러날 때는 우정에 금이 가기도 한다.
세상에서 엄마가 가장 좋던 어린 시절에 ‘부모 팔아서 친구 산다’고 엄마는 말했다. 그때 나는 그 말의 무게를 알지 못했다.
친구는 서로에게 짐이 되기도 하고, 서로를 받쳐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같은 공간에서 아무 말 없이 오래 앉아 있어도 편안한 것이 친구다.
때론 답답해하면서 정 깊은 사이, 고마워하면서 측은하게 바라보는 부부와도 같은 관계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오래된 친구 중에 둘이 그림을 그린다. 한 친구는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와서 리얼리즘을 추구한다.
한 곳만 파는 지극한 수구지심, 흔들림 없는 우직한 성격이다. 하지만 그의 전문성이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다.
또 한 친구는 늦게 시작했으나 전력투구의 열정으로 아카데미즘을 거쳐서 비구상에 이르렀다. 파리와 뉴욕 전방위로 활동하고 있다.
이 두 친구의 성정이 드러나는 극과 극을 달리는 화폭을 보면서 생각한다. 이는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이들의 희생과 땀의 시간들을 떠올리면
우러를 수밖에 없다. 내가 적당히 글 동네를 어정거릴 때, 그들은 일상의 안일과 평안을 버리고 오직 그림에 몰두했다.
나는 내 글에서 보다 그들의 그림에서 자연의 지극한 경지와 때로는 인간 내면의 환희와 갈등을 만난다.
느슨한 자세를 다잡게 하는 이 친구들은 내게 좋은 스승이기도 하다.
옛 선비들이 우정을 말할 때 부인은 잃으면 새 부인을 맞아 잘해주면 더 좋을 수도 있지만 친구를 잃는 것은 ‘제2의 나’를 잃은 것과 같다고 했다.
그들이 찾던 제2의 나, 그 한사람의 지기란 동시대의 고독과 절망을 함께하는 사람, 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이다.
벗 우(友)자는 손 수(手)자에 우(又)자를 포개놓은 모양이다. 사람의 두 손과 같이 어느 하나가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다.
나를 위해 온갖 일을 다 나서서 주선해주는 사람이다. 뒤집어 말하면 친구를 위해 온갖 일을 다 나서서 주선해주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연극 <아트>는 우정을 지키는 법을 생각하게 하고 진정한 우정을 돌아보게 한다. 명예나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닌,
위로받고 위로하는 친구 사이에도 마음을 다하는 예술 같은 기술이 필요하다.
'수필. 시 - 발표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무도 모른다 (0) | 2012.11.08 |
---|---|
사람, 사랑 사랑 (0) | 2012.07.05 |
노인은 나의 미래 (0) | 2012.03.18 |
안녕, 스티브 (0) | 2012.01.10 |
열흘 만에 떠난 안경 (0) | 2011.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