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랑 사랑
노정숙
그는 나의 우상이다.
갸름한 얼굴에 숱 많은 검은 머리, 동그란 안경 안에서 반짝이는 눈동자, 살짝 올라간 입가에 웃음기가 묻어있다. 그는 학문과 혁명, 우정과 사랑에 온몸을 던진다. 생각과 행동이 함께 나아가는 사람을 우러른다.
혁명이나 민주화에 대한 내 첫 경험은 중학교 때다. 입학식을 했는데 대학생들의 데모 때문에 바로 휴교를 했다. 늦잠을 자도 되며 종일 뒹굴거리며 책을 읽을 수 있으니 그 때가 마냥 좋았다. 길지는 않았지만 그런 때가 종종 있어서 내 숨통을 열어주었다.
그 후 내 20대는 데모에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최루탄 냄새 가득한 명동성당을 오르내리며 눈물 콧물 흘리며 지나왔다. 우울한 80년대를 어정쩡 거쳐서, 91년에 처음 이 책을 만났다.
보다 나은 세상으로 바꿀 수 있다는 열정인 혁명이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권의 책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느꼈다. 구호가 아닌 감성어로 시대의 변화를 알리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의식과 가치를 깨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사람아 아, 사람아!》는 중국현대사의 격변기인 문화대혁명을 겪은 지식인들이 정치적 이상과 신념이 어떻게 변화되어 가는가를 보여준다. 역사적 소용돌이에 대응하는 11명의 인물이 돌아가며 일인칭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한다. 같은 사건을 가지고도 피해자의 입장과 가해자의 시선, 방관자의 처지에서 서술한다. 삶이란 개인의 것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타인과 엮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점 전환으로 보여준다.
실패한 혁명은 무자비한 상처를 남긴다. 천안문 광장의 영웅들처럼 항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막대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처절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20년 동안 서로를 그리워하는 연인들이 시련 끝에 결실을 맺는 애틋한 사랑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묻는다. 사랑의 대서사는 인간 통찰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 ‘다이 호우잉’은 문화대혁명 중에는 혁명 대열의 전사로 참가했다. 그곳에서 당시 검은 시인으로 비판받던 시인 원제와의 비극적 사랑이 싹튼다. 이로 인해 반혁명 분자로 몰려 고난을 받은 체험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그의 용감한 사랑에 나는 열광했다. 묵직한 이데올로기가 머리를 누르면서도 가슴 한편에서는 사랑을 갈구하는 꽃바람이 피어난다.
혁명전선에서 사람의 피와 눈물의 흔적, 고통의 신음을 박진감 있게 그리며 인성의 복귀를 외친다. ‘사람아 아, 사람아’라며 사회주의에서 배우지 못한 인간학을 부르짖는다. 중국 현대 휴머니즘 문학의 기수답게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가슴 절절히 스며든다. 누구나 마음속의 ‘자기’와 대화한다. 고독한 사람일수록 마음속의 ‘자기’가 많다. 그 둘이 힘을 합쳐 고독을 이겨나가는 것이란다. 인생이란 얻는 것과 잃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때로는 잃지 않으면 얻을 수도 없다. 그의 통찰에 섞인 자조가 나를 바라보는 듯 서늘하다.
‘혁명이란 다른 누군가가 선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항을 통해서 획득하는 것이다’고 교육받은 이들은 투쟁하는 삶이 살아있는 삶이라고 외친다. 그때 중국은 정치철학이 바로 종교가 되고 경전이었다. 그들은 그 경전에 맞추기 위해 투쟁하고 또 투쟁하며 살았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 그 외에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를 외치는 이 책은 금서였다. 그러나 어느 날 느닷없이 나온 백묘흑묘(白描黑描)이론, 검은 고양이나 흰 고양이나 쥐만 많이 잡으면 된다는 것이다. 부자가 선(善)이 되는 사회가 되면서 그들이 투쟁하며 가꿔온 경전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것은 또 다른 혁명이다.
이념을 버리고 경제를 택한 공산국가, 이곳도 극심한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가 되었지만, 그 배후의 저력이 두렵다. 투쟁정신에 자유를 얹으면 강력한 힘이 나올 것이다. 요즘 중국은 잠에서 깬 사자다. 빠르게 발전하는 중국을 바라보며 위협의 조짐을 느낀다. 역사는 쉽사리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긴 시간을 거치며 낡았던 것이 의연히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시대를 앞서 간 휴머니스트의 외침은 역사의 거름이 되었다.
한 권의 책에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가치 - 혁명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으로서도 뛰어난 이 책은 나를 깨어있게 한다. 사람이 중심이지만 사랑 없는 사람은 허깨비다. 지금 내게 혁명은 나 자신에 대한 투쟁이다. 만사에 적당히 타협하려는 비겁함에 대한 저항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청색시대 18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