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노을
- 슈테판 헤름린
1
진정 즐겁게 산보하고자 하는 이들은 태양을 마주보고 간다고 오린 노래했다. 우리가 인(Inn)강 다리를 건널 때 태양은 동쪽 산등성이에 맞닿아 있었다. 넓고 끝없이 긴 계곡의 가운데께에 있는 다리 위에서 나는 선생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 채 한 순간 마냥 정지해 있었다. 빠르게 흐르는, 회색빛이 감도는 초록색 강물 바닥에서 나는 그 속에 살고 있는 송어떼를 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계곡이 끝나는 저 멀리 남쪽의 산을 쳐다 보았고, 그 산을 나는 나의 산이라고 불렀으며, 영원히 그 이름을 잊지 않았다. 라 마르냐. 그리고 그 높이 있던 하늘, 그건 얼마나 아득하였던가. 그때 그 하늘이 어쩌면 그토록 고요할 수가 있었는지, 아직도 구름이 엉켜질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먼 산을 향하여 눈길을 위로 쳐들었다간 깊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떨어뜨렸다. 깊숙함은 아래의 강물 뿐 아니라 사방으로부터 나를 휘감아 왔지만, 그 위의, 그 하늘보다 더 깊은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 속에서 나는 위로 허우적거렸고 아래로 가라앉았다. 나의 눈길은 여느 때처럼 구름들을 응시했다. 구름들은 마치 내 자신이 그러하듯이 방황하다간 수천 년을 그래왔듯이 좀 전처럼 다시 잠잠해 진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영원히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케 하는 가슴 아픈 무상함이었다.
비탈진 숲 위로 태양은 강렬하게 기막힌 푸르름 속에 작열하였고, 그 그늘 속에 나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알프스 장미를 꺾어 내 조그만 배낭 속에 넣으면서 쉬 다치지도, 시들지도 않을 거라고, 너무 싱싱한 꽃이어서 내가 집에 돌아온 뒤, 병에 꽂아둔 훨씬 후에도 나의 기억 속에선 영원히 불타오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숲 속에서는 뻐꾸기들이 울어대고, 그 울음 소리를 헤아릴 필요가 없듯이 내 앞엔 무한한 생이 놓여 있었다. 한낮이 정오를 향해 활처럼 곡선을 그리면,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견고하고 수백 년이 된 가옥들 속에 조용하고 안락하게 지내는 흔적을 곳곳에서 느꼈으며, 깨끗한 거리들엔 간혹 자동차 한 대가 삐걱거리며 지나가는가 하면, 저 멀리 목동 하나가 지팡이에 기대고 서서종달새들을 벗하여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점심 휴식 시간이 지난 늦은 오후, 강물을 따라 들판을 가로질러, 대농장을 지나 침끝처럼 뾰족한 스칸프 교회탑을 향해서 달려가면, 거긴 늙은 목사님 한 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와 함께 코네리우스 네포스를 읽었다. 벽시계 하나가 천천히 그러나 끊임없이 똑딱거렸다. 춤 추는 먼지와 담배연기를 모아 기둥 모양으로 나의 책 위로 떨어지게 하는 따스한 빛살에 휘감긴 채, 나는 졸음에 겨우면서도 행복하게 목사님의 문법 설명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동네 어귀에 모여 서 있는 한 무리의 농부들 옆에서 멈추어 서곤 하였다. 호기심을 크게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나는 그들이 하는 라디니쉬 언어나 독일어에 귀를 기울였다. 가끔씩 한두 사람이 나에게 무심하나 부드러운 눈초리를 보내 왔다. 나는 그들의 우람한 자태, 그들의 두툼하고 거무스름한 손을 관찰했다. 그들의 대화는 겨우 일부분만 이해할 수 있었다. 일요일이면 그네들은 휴일 외출복을 입고 교회 옆에 서 있었으며, 부인네들은 검정-빨강에 금빛으로 띠를 단 그 지방의 전통복을 입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수치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논과 밭, 목장과 동물들에 관한 한 완전한 지배자였으며, 사계절이 바뀌는 동안 하루하루 매번 무슨 일을 하여야 하는지 정통하여 있었다. 계곡을 건너는 그들의 발자국과 여기저기서의 잠시 지체함은 바로 한 체계의, 한 초 안의 선과 점이었다.
다시금 나의 시야가 활짝 열리면, 한 줄기 푸른 빛들은 헤아릴 수 없이 겹겹이 층을 지어 있고 한 가닥 붉은 빛은 서쪽 산마루 위로 스며들고 있었다. 구름의 뚜렷한 윤곽 사이로 첫 별들이 창백한 모습을 드러냈고 놀라움으로 어깨 넘어 뒤돌아 보면 저녁 독수리가 피데장의 캄캄한 세모꼴 위를 선회하는 모습이 보였다.
4
……
열세 살 때 우연히 나는 『공산당 선언』을 읽게 되었다. 그것은 후일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선 그 훌륭한 시적 문체가, 그리고는 그 말하는 바의 확고부동함이 나를 매료시켰다. 그 때문에 나는 수없이 반복하여 읽었고, 아마 수 년에 걸쳐 적어도 이삼십 번은 읽었을 것이다. 나의 선생 헤르만 둥커가 이 선언문에 관해 강의하는 것을 나는 세 나라에서 들었다. 둥커 선생은 아마 그 저서의 처음부터 마지막 단어까지도 모조리 외워서 말할 수 있을만큼, 맑스 이론을 감동의 눈물로 눈시울을 붉히면서 논하던, 이제는 더 이상 생존해 있지 않는 이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유명한 저서는 나로 하여금 보다 난해하고 광범위한 맑스 저작들로 유인하였다. 나이 오십이 되어서, 정말 기가 막힌 발견을 하기 전까지, 나는 그 저서에 관한 한 이미 정통해 있다고 자부하였다.
오랜 동안 나에게 너무도 당연했던 문장들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지나간 시민사회의 계급과 계급 간의 적대관계를 대신하여,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한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그러한 하나의 연합이 도래한다.” 언제부터 그 구절을 여기 쓴대로 그렇게 읽기 시작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당시 나의 세계관이 그와 상응하였기에 그렇게 읽었고, 또 그렇게 파악되었을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난 다음 그 구절이 실제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이 바로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나의 놀라움, 그 경악감은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는지 “……한 개인이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그러한 ……”
결국 하나의 내용 속에 다른 하나의 내용을 읽었던, 즉 내 스스로의 상상과 내 자신의 미숙함을 읽었던 사실이 또 한번 확인되었다. 그리고 하나의 말이 다른 말들을, 즉 표현하지 않은 그 무엇을 지적할 수도 있다는 논리를 거기 허용하고 결국 적용할 수 있었던, 다시 말해서 그 경우 완전히 불합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한 까닭 역시 바로 머리 속에 하나의 인식과 예언이 거꾸로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게는 경악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한 가닥 안도가 스며들었다. 오랜 동안 기대했던, 그러하기를 갈구했던 한 문장이 바로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21
나는 오랜 동안 만나지 못했던 E와 약속을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심부름꾼 하나가 나에게 와서 우리가 만날 시간과 장소를 일러주었다. 가는 도중에 나는 언제 어디서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기억하고자 하였으나 불가능하였고, 그 장소를 더 이상 내 기억 속에서 찾아낼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시간이 흐른 것처럼 여겨졌다.
내가 그 약속 지점에 닿았을 땐 땅거미가 완전히 내려 깔렸고, 내가 서있는 그 곳이 바로 내 유년시절의 집 정원이라는 걸 발견하곤 놀라움에 질렸다. 좁은 길들 위에 깔아놓은 조약돌들이 점점 짙어가는 어두움 속에 빛을 발하고 있었고, 마치 그림자처럼 늘어진 모가리 나무의 울타리를 보았다.
정자 속에는 검은 벽칠과는 대조적으로 밝게 칠을 한 가구들이 보였다. 은연중 E는 이미 몇 년 전 간데사에서 전사하였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혼자였고, 어두움은 한층 더 깊어만 가는데 두려움에 떨면서 나는 그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다만 어두움을 더욱 깊게 하는, 커텐 하나가 스르르 내려오면서 내 주변의 암흑을 차례차례 덮는 듯한 소리 뿐이었다.
26
……
그러나 곧 빛은 변신하였다. 나는 아무튼 계속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고, 하강하는 태양은 바위 뒤로 사라져버렸다. 바다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다만 바닷물의 중심부로부터 분리하는 길다란 곶과 먼 발치의 산들을 끼고 흐르는 한 지류만이 전면에 넓게 나타났다. 그건 몇 명의 어부들이 밤 고기잡이를 떠나고 있는 잔잔한 하나의 바다처럼 보였다. 태양빛은 파두아광장에서 나를 에워싸고 있던 그것처럼 부드럽고 압도하는 그 찬란한 푸르름을 닮아 있었다.
빛은 수평선 저 멀리로 점점 애틋한 장미색으로 변하며, 그 위론 하얗게 빛나는 구름고리들이 밀려가고, 땅에서는 우람찬 나무둥치가 간벌에 던지는 그림자 사이로 황금빛를 발해주고 있었다. 남녀들은 두세 무리씩 반라로 혹은 빨갛고, 하얗고, 노란색의 의상을 걸친 채 간벌에 앉아서 경직되고 생각에 잠긴 휴식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온화한 바람을 느꼈고 속삭임 하나가 들렸다. 한 음성이 되풀이 하였다. 항상, 항상, 항상 …… 아나 그것은 나의 음성이었던 것 같기도 하였다. 고요가 내 속으로 스며들었고, 나는 어느샌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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