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물레
-김종철
무슨 까닭인지 그동안 수입이 금지되었다가 최근 국내에서도 볼 수 있게 된 영화 중에 <간디>가 있다. 이 영화 자체는 보는 각도에 따라 미흡한 작품인 것도 사실이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간디의 반식민주의투쟁의 비교적 충실한 연대기가 작성되어 있음을 보지만, 간디라는 한 위대한 영혼과 그 영혼의 모태인 인도 민중의 근원적인 심성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깊이있게 들여다보는 시선을 느끼지는 못한다. 이것은 헐리우드영화의 피할 수 없는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사회교육적 가치는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파괴와 억압의 시대라고 할 수밖에 없는 오늘이 상황에서 비폭력의 이념을 고수했던 한 고귀한 인간에 마주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뜻깊은 경험이다. 더구나 이 영화는 매우 인상적으로, 일상생활속의 간디를 늘 물레를 돌리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간디의 사상의 진의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폭력주의와 물레 - 얼핏 보아서 별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이 양자간의 유기적 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간디사상의 근본에 이르는 첩경일 수도 있다.
말할 것도 업이 비폭력 ․ 비협력주의는 영국 식민당국을 불구화시키기 위한 투쟁적인 방책으로 기능하였다. 그러한 투쟁의 한 수단으로서 영국에서 수입되는 직물을 거부하고 인도의 민중이 그동안 잊혀졌던 전통적인 가내수공업을 부활시켜 스스로의 생활필수품을 지급자족하는 길이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식민지적 착취구조로부터의 이탈의 가능성고 실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현실정치 및 경제적 이해관계의 차원에서만 간디의 비폭력 ․ ,비협력주의를 본다는 것은 너무도 피상적인 관점이다.
간디사상이 요체인 비폭력주의는 하나의 유효한 정치적 투쟁수단이기 이전에 근원적으로 만유의 법칙을 사랑으로 파악하는 위대한 종교적 ․ 철학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폭력주의 운동은 결코 수동적인 저항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악에 대한 보답을 악으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거의 불가사의하게 깊고 부드러운 영혼속에서 우러나오는 실천적 행동이었다.
간디는 절대로 몽상가는 아니다. 그가 말한 것은 폭력을 통해서는 인도의 해방도, 보편적인 인간해방도 없다는 것이었다. 민족해방은 단지 외국지배자의 퇴각을 의미하는 것일 수는 없다. 참다운 해방은 지배와 착취와 억압의 구조를 타파하고 그 구조에 길들여져온 심리적 슴관과 욕망을 뿌리로부터 변혁시켜는 일 - 다시 말하여 일체의 '칼의 교의(敎義)‘로부터의 초월을 실현하는 것이다.
간디의 관점에서 볼 때, 무엇보다 큰 폭력은 인간의 근원적인 영혼의 요구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물질적 이득의 끊임없는 확대를 위해 착취와 억압의 구조를 제도화한 서양의 산업문명이었다.
근대 산업문명은 사람들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끊임없이 이기심을 자극하며, 금전과 물건의 노예로 타락시킬 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평화와 명상의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로 인하여 유럽의 노동계급과 빈민에게 사회는 지옥이 되고, 비서구지역의 수많은 민중은 제국주의의 침탈 밑에서 허덕이게 되었다.
여기에서 간디사상에 물레의 상징이 갖는 의미가 드러난다. 간디는 모든 인도사람들이 매일 한두 시간만이라도 물레질을 할 것을 권유하였다. 물레질의 가치는 경제적 필요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물레는 무엇보다 인간의 노역에 도움을 주면서 결코 인간을 소외시키지 않는 인간적 규모의 기계의 전형이다. 간디는 기계 자체에 대해 반대한 적은 없지만, 거대기계에는 필연적으로 복잡하고 위계적인 사회조직,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 도시화 낭비적 소비가 수반된다는 것을 주목했다. 생산수단이 민중 자신의 손에 있을 때 비로소 착취구조가 종식된다고 할 때,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는 그 자체 비인간화와 억압의 구조를 강화하기 쉬운 것이다.
간디는 산업화의 확대, 혹은 경제성장이 참다운 인간의 행목에 기여한다고 결코 생각할 수 없었다.
간디가 구상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자기충족적인 소농촌공동체를 기본단위로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국가기구의 소멸과 더불어 마을민주주의에 의한 자치가 실현되는 공간이다.
거기에서는 인간을 도외시한 이윤을 위한 이윤추구도, 물건과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탐욕도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은 비폭력과 사랑과 유대속에 어울려 살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하고, 자기완성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상에 매우 적합한 정치공동체라 할 수 있다.
간디에게 있어서, 물레는 그러한 공동체의 건설에 필요한 인간심성의 교육에 알맞은 수장이기도 했다. 물레질과 같은 단순하지만 생산적인 작없의 경험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위에 기초하는 모든 불평등사상의 문화적 ․ 심리적 토대의 소멸에 기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먹을 빵을 손수 마련해 먹는 창조적 노동’에의 참여와 거기서 얻는 기쁨은 소박한 삶의 가치를 진정으로 긍정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제공해줄 것이다라고 간디는 생각하였다.
결국 간디의 사상은 욕망을 억지로 참아야 하는 금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 지금까지와는 근복적으로 다른 것을 욕망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간디의 메시지는 경제성장의 논리에 대한 무비판적인 순종과 편의주의적 생활의 안이성에 깊숙이 젖어있는 우리들에게 헛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갖 생명에 위해를 가해온 산업문명이 인간생존의 자연적 ․ 생물학적 기초를 파괴하는 데까지 도달한 지금 그것이 정말 헛소리로 남는다면 우리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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