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은유로서의 질병 / 수전 손택

칠부능선 2009. 12. 24. 23:00

은유로서의 질병

- 수전 손택



  고대 세계를 관찰하다 보면, 흔히 질병이 신의 분노를 보여주는 도구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의 심판은 특정 공동체에게 향해질 수도 있었고, (『일리아드』의 제 1권을 보면, 아가멤논이 크리세스의 딸을 유괴한 테 대한 징벌로서 아폴론은 그리스 군이 역겹에 걸리게 만든다. 『외디푸스』에서는 죄를 범한 외디푸스 대왕의 존재 자체가 신성을 모둑하는 일이었기에 테베에 역병이 돈다)

 ……

  정신은 육체를 배반하는 법이다. 1917년 9월,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결핵에 관해 이렇게 언급했다. “내가 미처 알기도 전에, 내 머리와 폐가 뭔가 합의를 한 것 같다네.” 다시 말하자면, 한 사람의 육체가 자신의 감정을 배반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말년의 만이 발표한 소설 『검은 백조』를 보면, 꽤 나이가 든 여주인공이 마치 청춘인 양 어는 젊은 청년을 사랑하게 된다. 그녀는 완치가 불가능한 자궁암의 증세 때문에 생긴 출혈을 보고, 자신이 다시 월경을 하게 됐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육체의 배반은 그 자체의 내적 논리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 십상이다. 라이히는 프로이트가 “말을 할 때면……매우 아음다웠다”라고 회상한 적이 있다. “암이 프로이트를 공격한 부위도 바로 이곳이다.” 라이히는 이런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치명적인 질병과 이 질병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성격을 자기 방식대로 연결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

  질병을 더 이상 개개인의 도덕적 품성에 따라 주어지는 심판으로 보지 않고 내적 자아의 표출로 보게 됐다는 것이 어쩌면 덜 도덕적인 태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런 관점 역시 인과응보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도덕적이긴 마찬가지다. 어쩌면 훨씬 더 심하다고 할 수도 있다. 현대의 질병 (한때는 결핵, 오늘날에는 암)과 더불어, 질병이 성격을 드러내 준다는 낭만적인 관념은 별다른 변화 없이 성격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주장으로 확장됐다. 성격은 결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정념은 내면으로 들어가, 몸 속 깊은 곳에 있는 세포를 구석구석 덮쳐 해를 입히는 것이다.

  그로데크는 “아픈 사람 스스로가 병을 만든다”라고 말하면서, “환자 자신이 질병의 병인病因인 바, 우리는 다른 병인을 찾을 필요가 없다”라고 덧붙였다. “세균”은 그로테크가 기록해 놓은 “외적인 병인”의 맨 위에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 그 아래로는 “오한, 과식, 과음, 과로 등등”이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자면, 의사들이 “예방법, 살균 등으로 외적 병인을 공격”하기 훨씬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 몸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것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 메닝거가 좀더 최근에 주장한 정식은 이렇다. “질병은 부분적으로 외부의 세계가 희생자에게 무슨 일인가를 저지른 결과이긴 하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희생자가 자신의 세계와 자신 스스로에게 저지른 일의 결과이다…….” 이처럼 터무니없고 위험한 관점은 질병의 책임을 환자에게 덮어씌우는 짓이며, 의학적 치료가 얼마만큼이나 가능한지 알아내려고 하는 환자의 노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환자가 의학적 치료를 회피하도록 만든다. 치료 여부는 주고 환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느냐 - 이미 가혹한 시험을 당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능력 - 에 달려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자신이 죽기 1년 전인 1922년, 캐서린 맨스필드는 『일기』에 이렇게 적어 놓았다.


       "고약한 날이다……끔찍한 고통, 나약함.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몸만이 나약한게 아니다. 몸이  좀 나아지려면 먼저 내 자아를 치료해야만 한다……. 따로 자아를 치료해야만  한다. 그것도 즉시. 내 병세가 나아지지 않는 이유도 내 자아 때문이다. 마음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다."    


  맨스필드는 ‘자아’가 자신을 병들게 했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치료할 수만 있다면 절망적으로 커져만 가는 폐의 질병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결핵을 둘러싼 신화와 암을 둘러싼 최근의 신화는 모두 개인이 자신의 질병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암을 둘러싼 이미지가 훨씬 더 인과응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성격과 질병을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낭만주의적인 가치에서 보자면, 질병이란 정념으로 가득 차 잇을 때에 나타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어떤 질병에 달라붙는 가장 치욕적인 생각, 즉 감정을 억압하기 때문에 병이 난다는 생각도 분명히 존재한다. 이것은 그로데크와 라이히, 그리고 그들에게 영향 받은 수많은 작가들이 퍼뜨린 관점을 되풀이하는 모욕적인 언사이다. 암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 생기는 병이라는 관점을 가질 경우, 우리는 암 환자를 비난하게 된다. 이런 관점은 연민을 드러내긴 하지만, 그와 동시에 경멸을 시사하는 법이다.

 ……

  어느 현상을 암으로 묘사하는 일은 폭력을 선동하는 것이다. 정치 담론에서 암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숙명론을 조장할 뿐이며, ‘가혹한’ 조치를 - 질병은 죽음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널리 퍼져 있는 관념을 훨씬 튼튼하게 강화해 주는 것만큼이나 - 정당화해 줄 뿐이다. 질병의 은유가 무해한 적은 한 번도 없긴 했지만, 암의 은유야말로 최악의 경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암의 은유는 잠재적으로 집단 학살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정치 세력도 이 은유를 독점하지는 못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를 맑스주의의 암이라고 불렀다. 중국의 경우 4인방은 말년에 가서 그 무엇보다도 ‘중국의 암’이 되어버렸다. 존 딘은 닉슨에게 워터게이트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내부에 암을 갖고 있습니다. 대통령직과 가까운 곳에서 갈수록 자라나고 있습니다.” 아랍분쟁에서 흔히 쓰이는 은유, 즉 지난 20년 동안 이스라엘인들이 매일 같이 라디오에서 듣게 된 은유는, 이스라엘이 ‘아랍 세계의 한가운데 있는 암’이라든지, ‘중동의 암’이라는 은유다.


 

수전 손택

1933년 뉴욕 출생. 미국 최고의 에세이 작가이자 소설가이며 예술평론가다. 15세에 버클리대에 입학했다가 다시 시카고대로 옮겨 대학생활을 시작한 후 17세에 결혼한다. 25세에는 하버드대 철학박사학위를 받아 각 대학에서 철학강의를 맡는 등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특히 문단과 학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64년 그녀가 31세 되던 해에 발표한 해석에 반대한다캠프에 대한 단상이라는 두 편의 글 때문이었다. 당시는 마침 평론가 레슬리 피들러가 소설의 죽음을 선언해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던 해인지라 기존의 관습과 전통에 도전한 그녀의 에세이 두 편은 모더니즘의 종언을 선포한 피들러의 글과 함께 1960년대 반문화의 서장을 연 기념비적 선언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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