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책이랑

외면일기 / 미셸 투르니에

칠부능선 2009. 12. 14. 15:18

 

 

외면일기
- 미셸 투르니에

 

 

*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여행을 하는 동안의 여정과 그때그때 있었던 일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사건들, 날씨, 철따라 변하는 우리 집 정원의 모습,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 운명의 모진 타격, 흐뭇한 충격 따위를 노트에 적어두는 습관이 있었다. ‘일기’라고 부를 수도 있을 이것은 ‘내면의 일기’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외면일기’라는 이름을 만들어 붙여보기로 한다.

  ……

  나는 나의 창문을 열고 문밖으로 나설 때 비로소 영감을 얻는다. 현실은 나의 상상력의 밑천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어서 끊임없이 내게 경이와 찬미를 자아낸다.

                                                                                                                  - <머리말> 중에서

 

                                                                     *

  매년 1월 초에는 프랑크푸르트 근처, 노이-이젠부르그의 동부, 호이젠슈탐에 있는 중학교 체육관에서 기이한 축제가 열린다. 루프탄자 항공사 여객들이 분실하고 찾아가지 않은 여행가방을 경매하는 것이다. 경찰이 미리 수색하여 그 속에 무기나 마약, 혹은 시체 따위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다시 밀봉해놓은 가방들이다. 반면에 그 가방을 구입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오직 닫아놓은 가방을 보여준 다음 그 무게만을 공개한다. 그러나 일단 구입이 결정되면 가방은 즉시 개봉되어 낄낄대는 관중 앞에 그 내용물이 쏟아진다. 그야말로 도깨비상자다. 그것은 또한 사생활 속으로 깊숙이 빠져 들어가는 일이요, 많게든 적게든 내면적이고 시사적이며 잡다하게 뒤섞인 몇몇 물건들을 통하여 재구성한 한 운명의 발견이기도 하다.

 

                                                                   *

 

  나는 삼십 년 전에 조그만 전나무 두 그루를 서로 몇 미터 띄어서 심었었다. 나이를 먹자 이 나무들은 아직 가지가 서로 닿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가깝게 이웃하여 서 있다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만 같아 보인다. 넓은 공간이 있는 쪽의 나무는 다른 나무와 반대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지고 있다. 강한 서풍이 불자 그 나무는 결국 쓰러지고 만다.

  나무들이 서로를 미워하며 저마다 공간과 빛을 독차지하려고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숲 속에 들어가면 강제수용소 같은 증옹,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 집 전원의 모습이 달라진다. 어떤 나무들은 사라지고 어떤 나무들은 엄청난 크기로 자란다.

 

 

                                                                      *

 

  나는 새해의 시작을 구실 삼아 그동안 소식을 듣지 못한 몇몇 친구들에게 내 모습을 드러낸다. 친구를 잃어버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시 접촉하는 주도권을 그에게 맡겨두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그가 꼼짝도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

 

  입말고 글말,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글말의 문맹이다. 하지만 그 결과 그들이 교양 없는 인간들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에게 문화라는 것은 라디오, 텔레비전, 그리고 영화로써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게 공급해주는 입말의 수단을 거치는 것이다. 나는 캘커타에서 그러한 입말을 멋지게 활용하는 사례를 보았다. 인도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영화가 생산되고 있지만, 그 영화들은 국경을 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도 사람들은 영화라면 미칠 지경으로 좋아한다. 거리마다 떼를 지어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영화관 입장권을 살 돈이 없다. 그들은 쌈짓돈을 거두어 그 돈으로 그들 중 한 아이를 영화관에 들여보내서 영화를 보게 한다. 그들은 제일 똑똑하고 말을 잘하는 아이를 선택한다. 그의 사명은 막중한 것이다. 그는 영화를 보고 나와서 둘러앉은 친구들에게 그 내용을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고 질문에 대답해야 하니 말이다. 태고 적부터 전해오는 이야기꾼의 재주에 의한 기막힌 영화 재활용법이 아니고 무엇인가.

 

                      

                                                                         *

 

  질문 : 어떤 계기로 당신은 문학을 하게 되었는가? 그 대답은 이렇다. 1924년 10월 14일. 축제와 문학을 너무나도 좋아했던 나의 젊은 엄마는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의 국장國葬에 참가하게 되었다. 나는 같은 해 12월 19일에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태어날 날이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뱃속의 나도 그 장례식에 가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그때의 조사弔詞와 조가弔歌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들었다. 그리하여 나의 보드라운 태아의 살 속에 그것이 깊이 찍히게 된 것이니…….

 

 

                                                                          *

 

   장님이 말한다. “나는 이제 어둠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 그대가 내 몸을 더 이상 건드리지 않았을 때 그것이 어둠이구나.”

 

 

                                                                          *

 

  문학 분야에 있어서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을 구분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즉 자신이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책의 탁월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프로페셔널의 특권이 아닐까 한다. 반대로 아마추어는 자기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 싶으면 즉시 그 책의 분명한 장점들에 대해서도 아예 장님이 되어버린다.

  나는 1932년도 콩쿠르 상 심사위원회의 결정을 상기하면서 마음속으로 그런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그 해에 심사위원회는 가장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L.F.셀린느의 『밤의 끝으로의 여행』을 수상작으로 결전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나는 셀린느나 그의 글 TM는 방식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당연히 그래야 옳았겠지만, 나는 과연 그에게 찬성표를 던질 수 있었을까? 유감스럽지만, “그렇다”라고 감히 말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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